천성일 작가는 “사극은 어떤 시대를 쓰는지 보다 어떤 시대에 쓰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말한 바 있다. 사극이 지금 시점의 시대적 화두를 복기하거나 재현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동시에 대중 다수가 암묵적으로 욕망하고 있는 어떤 ‘결핍된’ 가치를 복원해내는 게 중요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는 작가가 갈등을 구축하는 데 좋은 출발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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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20대 문제라는 화두가 대충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로 귀결되며 흐릿해지는 양상인데, 이 문제에 대해 떠올릴 때마다 답답해진다. 세대 담론이 애초 당연히 이행되어야 마땅했을 계급적인 문제의식으로 발전하기는 커녕, 기성 세대들에 의해 ‘청춘’을 둘러싼 감상적 소회로 귀결되고 그 안에 갇혀버렸기 때문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애틋하고 축축한 말은 ‘외부 환경에 의해 강요된 아픈 시기를 어떻게 견뎌내야 할 것인가’라는 본질적이고 딱딱한 질문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이 겸연쩍게 만들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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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에서 김어준을 둘러싼 신앙간증 친위부대를 비판한 이후, 술자리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언급하면 너 한나라당편이냐며 싸움이 난다고. 집단지성과 시민의 힘이 불을 뿜으며 역적을 성령으로 압도하는 이 아름다운 시대를 이해하지 못한 점 사죄드리며 이번 주에는 바짝 엎드려 빤한 이야기나 해볼까 한다. 최근 이명박 정부의 한·미 FTA 비준지원 공익광고가 논란이 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시작한 한·미 FTA, 이명박 대통령이 마무리하겠습니다”라는 문구가 특히 문제였다. 당초 “지난 정부에서 시작한 (생략)이번 정부에서 마무리하겠습니다”라는 문구였으나 그렇게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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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상호의 <돼지의 왕>은 의외의 작품이다. 그간 한국 장편 애니메이션 지형도 위에서 볼 때 <돼지의 왕>은 일종의 기형적인 사건에 가깝다. 장르물이라는 점도 그렇지만 더 도드라지는 특징은 제작 과정에서 발견된다. 이건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이다. 정확한 기획에 잘 짜인 운영만 동반되면 스태프들에게 공정한 댓가를 지불하면서도 후반작업 비용을 포함해 6, 7억원 선에서 제작할 수 있다는 요지의 기사를 쓴 적이 있다. 당장 한 번에 <아키라>(80억원) <공각기동대>(75억원)가 필요한 게 아니라 잘 만든 ‘이야기’로서의 저예산 애니메이션이 필요하다는 주장이었다. 그러자 기존에 장편 애니메이션을 만들었고 지금은 교수를 하고 있는 어느 감독이 이의를 제기해왔다. 그런 제작비로 장편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며 당신은 현실을 모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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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냐리투의 신작 <비우티풀>은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다. 아버지에 관한 영화는 마음을 복잡하게 만든다. 특히 아버지와 화해하지 못한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거나 종종 황폐하게 만든다. 아버지를 다루는 영화가 닿을만한 종착지에는 두어가지 적당한 사례가 있다. 이를테면 <피와 뼈>처럼 결코 화해할 수 없었던 가부장의 짐승 같은 인생과 후회하지 않는 끝을 보여줄 수 있다. 혹은 <파리, 텍사스>처럼 있는 힘껏 참회하고 노력하며 끝내 모든 걸 책임지고 떠나가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줄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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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치고 뭘 믿으라는 거야>
믿음이란 사람을 편하게 하는 것이다. 신성이 강화될수록 믿음은 견고해진다. 덩달아 말에 자신감도 생긴다. 당위가 생기기 때문이다. 헌금으로 사랑을 증명하라는 거대교회 목사들의 자신감은, 우리 두목님을 스폰서로 두고 있고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이 모두 신성에 기반하고 있다는 푸근한 마음, 바로 마음으로부터 유래한다. 마음에서 유래한 것이기 때문에 폭력도 폭력이 아니라 건승이고 순교다. 나는 옳은 편에 있고 내 뒤에는 진심과 선의가 있으며 두목님의 승리를 위해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도 좋다는 희생 정신의 달콤함은 자발적 순교자들을 양산해낸다. 종교 프랜차이즈는 져본 적이 없다. 늘 이기는 게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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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지면에서 이미 <도가니>를 다루었다(도가니, 무진으로부터 온 편지).<도가니>라는 텍스트는 선동이나 분노가 아닌 공감의 방식으로 소비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이야기했다. 우리가 각자의 무진에 살고 있다는 공감, 여기 아픈 사람들이 있다는 공감, 옳은 일만 하고 살라는 게 아니라 그른 일을 세상의 필연적인 일부처럼 받아들일 이유는 없다는 공감, 그리고 그것이 그저 불편하다는 이유만으로 눈 앞에서 치워버리려 하지 말아달라는 공감 말이다. 분노는 눈에 보이는 것을 당장 단죄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감정은 사실 ‘불편하다는 이유로 눈 앞에서 치워버리려는’ 시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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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은 찾을 수 없는 곳이다.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승옥의 글에서, 공지영의 문장 안에서, 그리고 영화 <도가니>의 컷 안에서 무진은 그리 멀지 않은 공간으로 우리 앞에 열린다. 안개에 덮인 외딴 곳 무진에서 사람들은 자기 죄가 쉽게 보이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때로는 그렇게 어둡고 침침한 곳이기 때문에 더 많이 보이는 것들이 있다. 이를테면 사람의 속내, 누군가의 정체 같은 것들 말이다. 그것이 드러날 때, 우리는 화를 내거나 침묵한다. 물론 어느 쪽도 별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이 땅의 어디든 존재하는 이 면피의 공간은 얕은 분노와 은밀한 침묵 안에서 그 세를 불려왔다. <도가니>의 텍스트를 앞에 두고 당신은 얼마든지 불편해하거나 화를 내거나 손에 잡히지 않는 무언가를 규탄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건 당장의 분노가 아니다. 선동은 이 이야기의 우선적인 목적이 아니다. 이 영화는 공감에 관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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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도가니> 부산, 대구에서 관객과의 대화 진행합니다. 이번 주 일요일 부산 CGV 센텀시티 오후 한시, 대구 CGV 오후 다섯시 상영 후 진행되고요. 황규혁 감독, 공유, 정유미씨 참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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