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실에 불이 들어왔다. 남자는 어두운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영화는 예상보다 훨씬 더 형편없이 나왔다. 남자가 쓴 애초의 각본은 뱀파이어를 사냥하는 여고생을 다룬 오싹하고 멋진 이야기였다. 완성된 영화는 그의 각본에서 최소한의 캐릭터만 남긴 채 새로 쓴 것처럼 보였다. 가볍고 무성의했다. 남자는 크게 실망했다.
1992년의 일이다. 이후 그는 주로 남의 아이디어를 잘 계산된 각본으로 손 봐주는 일을 했다. <스피드>와 <토이스토리>가 그를 거쳐갔다. 좋은 경험이었다. 오스카상에 후보지명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건 결국 어디까지나 남 좋은 일에 불과했다. 크레딧은 좀체 쌓이지 않았다.
어느 날. 거짓말처럼 워너로부터 ‘뱀파이어를 사냥하는 여고생을 다룬 당신의 애초 설정을 가지고 동명의 TV드라마 시리즈를 만들어보지 않겠냐”는 제의가 들어왔다. 기회였다. 승낙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이후 남자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다. <버피 더 뱀파이어 슬레이어>(국내 방영제목: 뱀파이어 해결사)는 7년 동안 이어진 뒤 성공적으로 막을 내렸다. 남자의 이름은 조스 웨던이다. 조스 웨던의 인생에 있어서 <버피 더 뱀파이어 슬레이어>의 성공은 분명히 극적인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단지 시작에 불과하다는 걸 알아챈 사람이 있었을까. 글쎄. 그 자신도 몰랐을 것이다.

오컬트, SF, 만화덕후
조스 웨던은 기술적으로 뛰어난 각본가다. 그의 각본 안에서 캐릭터들은 자기 역할을 잘 알고 있을 뿐더러 매우 효율적으로 움직인다. 조스 웨던은 별 낭비나 누수가 없는 각본을 정확하게 계산해낼 줄 안다. <스피드>의 각본을 새로 써준 일화는 지금에야 잘 알려져 있으나, 정작 본편 크레딧에 그의 이름은 빠져있었다. 딱히 불공정한 일은 아니었다. 어찌됐든 당시 그의 역할은 ‘스크립트 닥터’였으니까.
각본을 쓰는 일에 있어서 장인에 가까운 기술을 자랑하는 조스 웨던이지만, 또한 그는 특정 문화의 애호가로써 자기 정체성과 성향이 뚜렷한 작가이기도 했다. <버피 더 뱀파이어 슬레이어> 시리즈만 봐도 드러나듯, 조스 웨던의 주요 관심사는 신비주의, 오컬트와 같은 하위 문화와 슈퍼히어로 코믹스, SF 장르, 그리고 페미니즘이다(잡지 ‘쌔씨’의 열혈 구독자이기도 했던 그는, 자신이 창조한 버피 캐릭터에 대해 “그녀는 새 시대의 대체 페미니스트”라고 표현한 바 있다). <버피 더 뱀파이어 슬레이어>의 성공 이후 그는 단 한 번도 관심사를 벗어난 이야기에 굳이 시간을 들이지 않았다.
<버피 더 뱀파이어 슬레이어> 방영 도중 조스 웨던은 크로스오버 개념의 시리즈 <엔젤>을 기획하고 역시 흥행에 성공했다. 물론 성공만 있었던 건 아니다. <파이어 플라이>가 있었으니까. 흡사 <카우보이 비밥>의 엉뚱한 실사판처럼 보이기도 하는 <파이어 플라이>는, 소수 마니아층의 열광에도 불구하고 시청률 부진으로 인해 한 시즌만에 조기 종영 당하는 굴욕을 겪었다.
그런데 이변이 벌어졌다. <파이어 플라이>의 DVD 박스세트가 발매와 동시에 엄청난 판매고를 기록한 것이다. 처음에는 조기 종영에 대한 일종의 반발 심리에 가까웠다. 그러나 폭발적인 시장 반응에 이어 뒤늦게 작품의 가치를 깨달은 사람들로부터 시리즈 재개 요구가 빗발쳤다. <파이어 플라이>는 결국 다시 만들어지지 않았다. 다만 <파이어 플라이>의 뒷 이야기를 다룬 두시간 짜리 극장용 장편이 기획되었다. <세리니티>(2005)다. 이 영화는 조스 웨던의 장편 극영화 감독 데뷔작이다. <세레니티>가 대단한 흥행작은 아니었다. 그러나 역시 호평을 받았다. <세레니티>에서 우리는 다수 캐릭터의 역할을 정확하게 조율하고 극 전반의 호흡을 찾아가는 ‘연출자 조스 웨던’의 재능을 확연히 목격할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재능은 당시로선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엉뚱한, 그러나 엄청나게 큰 영화를 통해 다시 한 번 확인받게 된다. 맞다. 당신이 지금 떠올리고 있는 바로 그 영화 말이다.

어벤져스와 캐빈 인 더 우즈
황당한 기획이었다. 마블 코믹스의 어벤져스를 스크린에 재현하겠다는 생각은 야심을 넘어 몽상에 가까웠다. 실현되더라도 우스꽝스러워 보일 게 빤했다. 대체 영화 한 편에서 그 많은 캐릭터들의 드라마를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스파이더맨> 정도를 제외하면 <판타스틱4> <헐크> <데어데블> 등 마블 원작 영화들이 줄줄이 흥행에 실패한 마당에 무슨 수로 투자를 받을 것인가. 이 유서 깊은 코믹스 팬덤의 다양한 기대치를 어떻게 충족할 것인가.
그러나 마블은 집요했다. 직접 제작사를 만들었다. <아이언맨>부터 <인크레더블 헐크> <토르> <캡틴 아메리카>에 이르기까지. <어벤져스>로 향하는 밑그림을 하나씩 완성해나갔다. <캡틴 아메리카> 말미에 삽입된 <어벤져스> 예고편은 사람들의 탄식을 자아냈다. 이게 정말 가능했단 말인가.
그리고 이 기획의 중심에, 수 년 동안 보이지 않는 곳에서 큰 설계를 담당하고 이야기와 캐릭터를 조율해온 단 한 사람이 발견된다. 조스 웨던 말이다. 이 설계도 안에서 조스 웨던은 단지 <어벤져스> 한 편의 감독이 아니었다. <어벤져스>의 가장 빼어난 미덕은 덩치가 크고 비싼 블록버스터임에도 인물들의 개성과 화학작용이 뛰어나다는 데 있다. 각 캐릭터들의 역할을 결정하고 독자적 스토리라인을 빈틈없이 조립해 큰 그림을 완성해내는 데 조스 웨던의 비전이 결정적이었다. 그가 <어벤져스>를 가능케 했다.
이번에 개봉하는 <캐빈 인 더 우즈>는 <어벤져스> 보다 먼저 기획된 작품으로, 조스 웨던의 또 다른 미덕이 제대로 발휘된 영화다. 조스 웨던이 각본을 썼고 역시 <버피 더 뱀파이어 슬레이어>때부터 호흡을 맞춰 온 드류 고다르가 연출했다. 얼핏 <버피 더 뱀파이어 슬레이어>의 확장된 에피소드처럼 보이는 이 전복적인 이야기는 기존 호러영화의 장르 관습을 통틀어 농담처럼 이죽거린다. 여기까지는 케빈 윌리엄슨의 <스크림>과 똑같은 태도다. 그런데 <캐빈 인 더 우즈>는 이에 그치지 않고 그런 비틀기 농담을 세계관의 문제로 확장시켜버린다. 뜬구름 잡는 이야기처럼 들리는 건 안다. 숲 속 오두막 좀비물로 시작해 러브크래프트 고대신 개념으로 치달아가는 이 기상천외한 영화에 대해서는 설명할수록 스포일러만 노출된다. 확인해 봐야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조스 웨던은 현재 일단 휴식을 취하고 있는 중이다. <어벤져스>까지 이르는 수 년 동안 완벽하게 소진되었다고 하는데, 일단 <어벤져스 2> 연출에 관해선 정확한 언급을 피하는 중이다. 시리즈를 망칠 생각이 아니고서야 마블 스튜디오와 디즈니가 조스 웨던을 포기할 일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들이 포기한다면 타 제작사에서 <저스티스 리그>나 크리스토퍼 놀란 이후의 배트맨 기획을 맡길 게 빤하다. 그러니까. 아니. 음... 생각해보니 그것도 나쁠 게 없는데? (이 기사는 한달 전에 쓴 것으로, 조스 웨던은 현재 <어벤져스2>의 연출을 맡기로 확정된 상태입니다)
허지웅(비욘드)




덧글
최강로봇 도라에몽 2012/08/17 13:53 # 답글
여기서 궁금한건 조스웨던은 시네마틱 마블 세계관에 얼마나 관여 했냐인데 혹시 어느정도인지 알고 계신가요?
잠본이 2012/08/17 23:28 #
공식적으로 알려진 바로는 <캡틴 아메리카 : 퍼스트 어벤저>의 각본 일부를 고쳐썼고, <토르 : 천둥의 신>의 쿠키 장면을 촬영했습니다. <어벤저스>의 쿠키 장면에 타노스가 등장한 것도 조스아저씨 아이디어랍니다.
사실 MCU를 진두지휘하는 인물은 마블 스튜디오 사장인 케빈 파이지(Kevin Feige)라는 게 정설이고 조스아저씨 또한 이 양반의 장기말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게 무서운 점이죠(...)
묘묘 2012/08/17 17:11 # 답글
그거 굉장히 재미있게 봤는데..
전체를 조율하면서 맥을 관통하는 연출의 재능..이라..
기대되네요.
츄플엣지 2012/08/17 20:11 # 답글
잠본이 2012/08/17 23:29 # 답글
a 2012/08/21 21:05 # 삭제 답글
bjj 2012/08/22 21:13 # 삭제 답글
!!!
W/T 2012/09/01 23:59 # 삭제 답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