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강범구 감독의 <괴시> (80') 찾아 삼만리
<아트앤리빙> 에서 의뢰받고 썼던 글인데, 이번에 <오마이뉴스> 에 등록하면서 새롭게 손을 좀 봤다. 사실 <괴시>는 애초부터 가지고 있었고, < Let Sleeping Corpses Lie>의 표절이라는 사실도 오래전에 모란봉13호님의 조언을 통해 알고 있었다. 다만 기사를 빨리 쓰기 위한 방법으로 약간의 타협을 보았을뿐 !
----------------------------------------------------------------------------------------------
호러 영화는 여러 가지 면에서 매력적인 장르이다. 이 장르 자체에 내재되어 있는 B급 감성과 인간 심리에 대한 탁월한 고찰은 그 어떤 장르의 외피로도 구현하기 힘든 것이다. 흔히들 공포 영화 하면 80년대의 헐리우드 슬래셔 무비들을 떠올리면서 저질 장르라고 속단하는 관객들과, 편견과 아집으로 똘똘 뭉친 일부 평론가들 덕분에 한국에서의 호러 영화는 오랫동안 그리 환영받는 장르가 아니었다.
그런데 사실, 군사독재의 서슬 퍼런 검열로 인해 그 명맥이 단절되기 전까지의 한국 영화를 돌이켜보면, 예상외로 작품성 있는 수많은 호러작품들을 찾아 볼 수 있다. 부산 영화제를 통해서 조명을 받고 현재는 많이 알려진 김기영 감독을 비롯하여, 고영남, 박윤교, 이용민 등의 감독들이 이때 활약한 대표적인 호러 영화 감독들이다.

이번 미션의 주인공인 강범구 감독의 80년도 작품 <괴시>는 '좀비' 가 등장하는 전무후무한 한국 영화로 알려져 있다. 강범구 감독은 신상옥, 정창화 같은 감독들의 밑에서 스텝으로 활동한바 있으며, <서울 야화 (69')> <풍운의 권객(74') > 같은 맬로나 액션 영화들을 주로 연출한 감독이다. 그래서 <괴시> 는 그의 필모그래피 가운데서 특이한 케이스에 해당하는데, '좀비' 가 등장하는 한국 영화라는 특징 하나 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는 작품이다.
이미 원본 필름의 행방이 묘연해 진 상황에서 <괴시> 를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출시된 비디오를 찾는 것 뿐이다. 문제는 <괴시> 가 상당한 희귀작으로써, 국내 비디오 샵 에서 구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라는 점이다. 도대체 우리는 무엇이 그리도 바빠서 예술 작품의 보존과 복원에 이리도 인색한 것일까. 우리가 예전에 미처 보존치 못한 작품들을 수출한 나라까지 찾아가서 역수입 해와야 하는 현실은 참으로 서글픈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출시된 바 있는 비디오이니 찾으면 나올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가지고, 미션에 착수했다.
첫번째 시도
막상 편집부에 껄껄거리며 큰소리는 쳐놨지만 도대체 <괴시> 를 어디서 구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일단은 정보의 바다인 인터넷을 십분 활용해보기로 했다. 대부분의 중고 비디오 쇼핑몰은 보유하고 있는 테잎들의 리스트를 제공하고 있으며 국가나 영화제 수상작 별로 카테고리를 나눠놓은 곳도 있어서 원하는 비디오를 검색하는 것은 예상 외로 수월한 일이다. 황학동이나 동네의 중고 테잎 처분하는 곳에서 반나절을 허송 세월 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장점은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그린 비디오 (http://www.greenvdo.com/) , 고씨네 (http://www.go-cine.co.kr/) 비디오119 (http://www.vd119.com/), 그리고 영화 보물섬 (http://www.movietreasurelsland.co.kr) 같은 경우는 비교적 잘 알려진 온라인 중고 비디오 샵이다. 하지만 이 곳들에서 <괴시> 를 찾는 일은 실패로 돌아갔다. 마지막으로 들른 키노 아츠 플라자 (http://www.cinevideo.net/) 에서 마저 <괴시> 는 찾아 볼 수 없었다. 이쯤 되면 항복이다. 역시 사래 긴 밭은 재 너머에 있는 법 아니던가. 내일부터는 발로 뛰는 수 밖에 없겠다.
황학동을 찾아서

큰일이다. 주간 예보를 보니 원고 마감일까지 하루도 빼놓지 않고 비가 온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아낸 것이다. 이를 어쩐다. 창 밖을 보니 한밤중인양 어두컴컴했지만 아직은 비가 내리지 않는다. 서둘러 장비를 챙기고 길을 나섰다. 목적지는 당연히 청계천 황학동 시장이다. 청계천 보수 공사로 인해 황폐화되다 시피 했지만, 여전히 대한민국에서 유통중인 거의 대부분의 중고 테잎들이 이 곳을 거치고 있기 때문에 <괴시> 를 찾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곳의 좋은 점은 흥정하기에 따라서 가격을 합의 보기가 수월하다는 점이다. 중고품의 특성 상, 정가는 의미가 없으며 나름의 프리미엄이 붙은 작품 같은 경우는 기십만원이 넘어가기도 한다. 운만 좋으면 초 희귀작들을 은근슬쩍 싼값에 업어 올 수도 있다는 것은 이 곳만의 장점이다. 황학동을 찾기 전에 미리 유념해야 할 점은 매달 3째주 화요일이 휴무라는 점이다. (원래 4째주 였지만 최근에 바뀌었다. 착오 없길!)
먼저 찾은 곳은 젊은 남자 (02-2236-0080) 이다. 삼일 아파트 15동 2층에 자리잡고 있는 이 곳은 예전에도 몇 번 찾은 적이 있는 곳이다. 찾아간 날은 마침 보수 공사를 마친 지 얼마 안 되는 때여서 테잎들이 여기저기 어지럽게 쌓여져 있었다.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테잎들 무더기를 뒤척이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테잎들은 장르, 국적에 상관없이 마구잡이로 뒤섞여 있다. 다행이나마 한국 영화는 한쪽에 따로 모아져 있었다. 한 시간 남짓 찾아봤지만 <괴시> 는 찾을 수 없었다. 대신 김기영 감독의 <화녀 71'> 을 비교적 싼 가격에 집어 들고 가게를 나섰다.

조금 더 올라가서 18동에 다다르면 쌍마 비디오 (02-2254-4057) 를 찾을 수 있다. 2층으로 올라가면 왼쪽으로 보이는 것이 '쌍마 비디오' 이다. 사장님이 친절하시고 테잎들이 비교적 잘 정리되어 있어 자주 찾는 곳이다. <괴시> 를 물어보니 못 본것 같다는 말씀을 하신다. 이런. 또 다시 한쪽 벽에 또아리를 틀었다. 하지만 30분만에 백기. 아무래도 오늘은 날이 아닌가 보다. 그냥 가기는 아쉬워서 1000원에 5개 하는 테잎들 중에서 재생 시간이 가장 긴 걸로 5개를 골라서 구입했다. 출시시기만 적당한 것으로 잘 고르면 공 테잎으로 재활용하기에 적당하다. 이 또한 생활의 지혜.

쌍마 비디오를 나와서 바로 맞은편을 보면 비디오 여행 (02-2238-6798 www.82dvd.co.kr) 을 찾을 수 있다. 이 곳은 규모면으로는 황학동에서 가장 큰 편에 속한다. 정리도 나름대로 깨끗하게 잘 되어있는 편이어서 사람들이 자주 들르는 곳이다. 이 곳 사장님도 <괴시> 는 잘 모르시겠다고 하신다. 별 수 있나. 마음 편하게 먹고 첫번째 진열장부터 찾아보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하다보니 이것도 중노동이다. 1시간 정도 흐르고 나자 이제는 <괴시> 찾는 것은 아예 포기하고 DVD 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얼마 전에 출시한 '쇼브라더스' 의 DVD 들이 퍼뜩 눈에 들어온다. 내친 김에 <펀치 드렁크 러브> 의 중고 DVD를 하나 구입해서 매장을 나왔다.

길가에 늘어선 다른 중고 테잎 가게들에서 <괴시> 를 수소문 해봤지만 헛수고 였다. 하는 수 없이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돌아 갈 수 밖에 없었다. 돌아오는 길은 웬지 서글펐다. 을씨년스러운 날씨보다는 황학동의 휑한 거리가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한때 이 거리를 가득 메웠던 사람들과 상인들의 모습이 공사장의 뿌연 먼지 사이로 아른거린다.
마지막 보루
다음 날, 종로 2가에서 을지로 방향으로 가는 길의 구 쁘렝땅 백화점 지하에 위치해 있는 청춘극장 (02-318-3645 www.oldcine.co.kr) 을 찾아갔다. 이 미션을 시작할 때부터 최후의 보루라고 생각했던 곳이다. 이미 매스컴을 통해서 몇 번 알려진 바 있는 이 곳은, 국내외 논문을 준비하는 많은 학생들, 방송사, 각 학교, 기관, 심지어는 미국과 유럽의 대학에 까지도 <한국영화>를 공급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필자의 경우도 찾다 찾다 못 찾은 작품들을 이 곳을 통해서 입수한 경우가 수도 없이 많다. 들어가자 마자 사장님께 인사할 겨를도 없이 <괴시> 를 물었다. 그런데 아뿔싸. 얼마 전에 팔려나갔다고 하시는 게다. 얼마나 있으면 다시 입고 될 수 있을까 여쭤보았지만 희귀한 영화라서 기약이 없다는 말만 들을 수 있었다. 아픈 마음을 접어두고 오랜만에 들른 김에 매장을 둘러보았다.
다른 곳에서는 찾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성형미인-장일호 감독> <영마 (원제:영노-이성구 감독)> <목없는 여살인마-김영환 감독> 등을 발견 할 수 있었다. 이런 작품들은 정말이지 구하기 힘든 희귀작이다. 이 곳은 사장님만의 노하우를 통해서 작품들이 철저하게 잘 정리되어 있으며 한국에서 구할 수 없는 작품들 같은 경우에는 외국에서 수입을 해서라도 보유하고 있어, 처음 방문한 이들은 자료의 방대함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결국, 사장님이 선물이라면서 주신 <아들을 동반한 검객> 테잎을 들고 매장을 나섰다. 이렇게 되면 <괴시> 를 찾는 것은 사실 상 불가능해진 것 같다. 이대로 실패란 말인가..

<괴시>는 표절작?
기회는 엉뚱한 곳에서 찾아 왔다. '청춘극장' 에서 <괴시> 의 테잎을 구입해 간 사람이 본인과 가까운 벗이라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 것이다. 이런 황망한 일이 있나. '바닥이 좁다' 라는 말은 이럴때 실감이 간다. 친구를 닥달해서 <괴시>를 입수 할 수 있었다. 테잎을 받아 드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영화는 해충을 박멸하기 위해서 개발된 기계의 영향으로 시체들이 살아나 인간들을 공격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감상하는 내내 아무래도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없다. 방 한켠의 DVD 들을 뒤척이다가 드디어 그 원인을 알아챘다. Jorge Grau 감독의 74년도 작품의 완벽한 표절이었던 것이다. 이 영화는 이태리에서는 <좀비 3> 라는 제목으로 유명한 작품이다. 기본적인 플롯이나 상황 설정, 심지어는 배우들의 대사까지 똑같은 것을 확인하자 아연실색 할 수밖에 없었다. 강범구 감독의 대부분의 작품들이 표절 시비에 휘말렸던 것을 생각해보면 특출난 사실도 아니지만, <괴시> 를 입수하기 위해서 몇 일간 동분서주한 것을 생각하니 괘씸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생각해 보면 당시의 한국 영화들 중에서는 표절 작품이 상당 수 존재했다. 이것은 물론 수입 쿼터를 따내기 위해서 무분별하게 영화를 찍어내는 과정에서 발생한 부작용이었다. 잘 알려져있듯이, 김기덕 감독의 <맨발의 청춘> 도 알고 보면 일본 영화의 심각한 표절작이다. 하지만 몇몇 표절작들 때문에 폄하시키기에는 보석과도 같은 한국 고전 영화들이 너무나도 많다. 결국 이번 미션은 간간히 들려오던 '한국 최초의 좀비 영화 <괴시> 가 사실은 표절작이더라' 라는 소문이 사실이라는 것을 실증한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괴시> 를 찾아다니면서 목격했던 청계천의 쓸쓸한 모습들은 '비디오 테잎' 이라는 이 오래된 미디어의 운명과도 맞닿아있는 듯 했다. 오래된 것들은 언젠가는 청산되고 새로운 것이 그 자리를 메꾸기 마련이다. 하지만 친구 처럼 아늑했던 과거와의 이별은 늘 눈두덕을 무겁게 만든다. 항상 그 자리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이제는 낡은 사진첩의 고색 창연한 필름으로 남고 말았다. 새로운 것에 대한 갈망에 못지 않게, 오래된 것들을 잊지 않고 보존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 또한 필요한 때가 아닌가 싶다.
이번 기획 기사를 계기로 많은 사람들이 고전 한국 호러물에 관심을 가질 수 있게 되길 진심으로 갈망한다. 참고로 10월 말경에 호러타임즈(http://horrortimes.net/) 에서 한국 호러 영화 상영회를 개최할 예정이니 뜻 있는 분들은 방문해보시길 권한다.
[ozzyz] 허지웅 ⓒ
이 글은 <아트앤리빙> 가을호와 <오마이뉴스> 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아트앤리빙> 에서 의뢰받고 썼던 글인데, 이번에 <오마이뉴스> 에 등록하면서 새롭게 손을 좀 봤다. 사실 <괴시>는 애초부터 가지고 있었고, < Let Sleeping Corpses Lie>의 표절이라는 사실도 오래전에 모란봉13호님의 조언을 통해 알고 있었다. 다만 기사를 빨리 쓰기 위한 방법으로 약간의 타협을 보았을뿐 !
----------------------------------------------------------------------------------------------
호러 영화는 여러 가지 면에서 매력적인 장르이다. 이 장르 자체에 내재되어 있는 B급 감성과 인간 심리에 대한 탁월한 고찰은 그 어떤 장르의 외피로도 구현하기 힘든 것이다. 흔히들 공포 영화 하면 80년대의 헐리우드 슬래셔 무비들을 떠올리면서 저질 장르라고 속단하는 관객들과, 편견과 아집으로 똘똘 뭉친 일부 평론가들 덕분에 한국에서의 호러 영화는 오랫동안 그리 환영받는 장르가 아니었다.
그런데 사실, 군사독재의 서슬 퍼런 검열로 인해 그 명맥이 단절되기 전까지의 한국 영화를 돌이켜보면, 예상외로 작품성 있는 수많은 호러작품들을 찾아 볼 수 있다. 부산 영화제를 통해서 조명을 받고 현재는 많이 알려진 김기영 감독을 비롯하여, 고영남, 박윤교, 이용민 등의 감독들이 이때 활약한 대표적인 호러 영화 감독들이다.

이번 미션의 주인공인 강범구 감독의 80년도 작품 <괴시>는 '좀비' 가 등장하는 전무후무한 한국 영화로 알려져 있다. 강범구 감독은 신상옥, 정창화 같은 감독들의 밑에서 스텝으로 활동한바 있으며, <서울 야화 (69')> <풍운의 권객(74') > 같은 맬로나 액션 영화들을 주로 연출한 감독이다. 그래서 <괴시> 는 그의 필모그래피 가운데서 특이한 케이스에 해당하는데, '좀비' 가 등장하는 한국 영화라는 특징 하나 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는 작품이다.
이미 원본 필름의 행방이 묘연해 진 상황에서 <괴시> 를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출시된 비디오를 찾는 것 뿐이다. 문제는 <괴시> 가 상당한 희귀작으로써, 국내 비디오 샵 에서 구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라는 점이다. 도대체 우리는 무엇이 그리도 바빠서 예술 작품의 보존과 복원에 이리도 인색한 것일까. 우리가 예전에 미처 보존치 못한 작품들을 수출한 나라까지 찾아가서 역수입 해와야 하는 현실은 참으로 서글픈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출시된 바 있는 비디오이니 찾으면 나올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가지고, 미션에 착수했다.
첫번째 시도
막상 편집부에 껄껄거리며 큰소리는 쳐놨지만 도대체 <괴시> 를 어디서 구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일단은 정보의 바다인 인터넷을 십분 활용해보기로 했다. 대부분의 중고 비디오 쇼핑몰은 보유하고 있는 테잎들의 리스트를 제공하고 있으며 국가나 영화제 수상작 별로 카테고리를 나눠놓은 곳도 있어서 원하는 비디오를 검색하는 것은 예상 외로 수월한 일이다. 황학동이나 동네의 중고 테잎 처분하는 곳에서 반나절을 허송 세월 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장점은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그린 비디오 (http://www.greenvdo.com/) , 고씨네 (http://www.go-cine.co.kr/) 비디오119 (http://www.vd119.com/), 그리고 영화 보물섬 (http://www.movietreasurelsland.co.kr) 같은 경우는 비교적 잘 알려진 온라인 중고 비디오 샵이다. 하지만 이 곳들에서 <괴시> 를 찾는 일은 실패로 돌아갔다. 마지막으로 들른 키노 아츠 플라자 (http://www.cinevideo.net/) 에서 마저 <괴시> 는 찾아 볼 수 없었다. 이쯤 되면 항복이다. 역시 사래 긴 밭은 재 너머에 있는 법 아니던가. 내일부터는 발로 뛰는 수 밖에 없겠다.
황학동을 찾아서

큰일이다. 주간 예보를 보니 원고 마감일까지 하루도 빼놓지 않고 비가 온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아낸 것이다. 이를 어쩐다. 창 밖을 보니 한밤중인양 어두컴컴했지만 아직은 비가 내리지 않는다. 서둘러 장비를 챙기고 길을 나섰다. 목적지는 당연히 청계천 황학동 시장이다. 청계천 보수 공사로 인해 황폐화되다 시피 했지만, 여전히 대한민국에서 유통중인 거의 대부분의 중고 테잎들이 이 곳을 거치고 있기 때문에 <괴시> 를 찾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곳의 좋은 점은 흥정하기에 따라서 가격을 합의 보기가 수월하다는 점이다. 중고품의 특성 상, 정가는 의미가 없으며 나름의 프리미엄이 붙은 작품 같은 경우는 기십만원이 넘어가기도 한다. 운만 좋으면 초 희귀작들을 은근슬쩍 싼값에 업어 올 수도 있다는 것은 이 곳만의 장점이다. 황학동을 찾기 전에 미리 유념해야 할 점은 매달 3째주 화요일이 휴무라는 점이다. (원래 4째주 였지만 최근에 바뀌었다. 착오 없길!)
먼저 찾은 곳은 젊은 남자 (02-2236-0080) 이다. 삼일 아파트 15동 2층에 자리잡고 있는 이 곳은 예전에도 몇 번 찾은 적이 있는 곳이다. 찾아간 날은 마침 보수 공사를 마친 지 얼마 안 되는 때여서 테잎들이 여기저기 어지럽게 쌓여져 있었다.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테잎들 무더기를 뒤척이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테잎들은 장르, 국적에 상관없이 마구잡이로 뒤섞여 있다. 다행이나마 한국 영화는 한쪽에 따로 모아져 있었다. 한 시간 남짓 찾아봤지만 <괴시> 는 찾을 수 없었다. 대신 김기영 감독의 <화녀 71'> 을 비교적 싼 가격에 집어 들고 가게를 나섰다.

조금 더 올라가서 18동에 다다르면 쌍마 비디오 (02-2254-4057) 를 찾을 수 있다. 2층으로 올라가면 왼쪽으로 보이는 것이 '쌍마 비디오' 이다. 사장님이 친절하시고 테잎들이 비교적 잘 정리되어 있어 자주 찾는 곳이다. <괴시> 를 물어보니 못 본것 같다는 말씀을 하신다. 이런. 또 다시 한쪽 벽에 또아리를 틀었다. 하지만 30분만에 백기. 아무래도 오늘은 날이 아닌가 보다. 그냥 가기는 아쉬워서 1000원에 5개 하는 테잎들 중에서 재생 시간이 가장 긴 걸로 5개를 골라서 구입했다. 출시시기만 적당한 것으로 잘 고르면 공 테잎으로 재활용하기에 적당하다. 이 또한 생활의 지혜.

쌍마 비디오를 나와서 바로 맞은편을 보면 비디오 여행 (02-2238-6798 www.82dvd.co.kr) 을 찾을 수 있다. 이 곳은 규모면으로는 황학동에서 가장 큰 편에 속한다. 정리도 나름대로 깨끗하게 잘 되어있는 편이어서 사람들이 자주 들르는 곳이다. 이 곳 사장님도 <괴시> 는 잘 모르시겠다고 하신다. 별 수 있나. 마음 편하게 먹고 첫번째 진열장부터 찾아보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하다보니 이것도 중노동이다. 1시간 정도 흐르고 나자 이제는 <괴시> 찾는 것은 아예 포기하고 DVD 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얼마 전에 출시한 '쇼브라더스' 의 DVD 들이 퍼뜩 눈에 들어온다. 내친 김에 <펀치 드렁크 러브> 의 중고 DVD를 하나 구입해서 매장을 나왔다.

길가에 늘어선 다른 중고 테잎 가게들에서 <괴시> 를 수소문 해봤지만 헛수고 였다. 하는 수 없이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돌아 갈 수 밖에 없었다. 돌아오는 길은 웬지 서글펐다. 을씨년스러운 날씨보다는 황학동의 휑한 거리가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한때 이 거리를 가득 메웠던 사람들과 상인들의 모습이 공사장의 뿌연 먼지 사이로 아른거린다.
마지막 보루
다음 날, 종로 2가에서 을지로 방향으로 가는 길의 구 쁘렝땅 백화점 지하에 위치해 있는 청춘극장 (02-318-3645 www.oldcine.co.kr) 을 찾아갔다. 이 미션을 시작할 때부터 최후의 보루라고 생각했던 곳이다. 이미 매스컴을 통해서 몇 번 알려진 바 있는 이 곳은, 국내외 논문을 준비하는 많은 학생들, 방송사, 각 학교, 기관, 심지어는 미국과 유럽의 대학에 까지도 <한국영화>를 공급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필자의 경우도 찾다 찾다 못 찾은 작품들을 이 곳을 통해서 입수한 경우가 수도 없이 많다. 들어가자 마자 사장님께 인사할 겨를도 없이 <괴시> 를 물었다. 그런데 아뿔싸. 얼마 전에 팔려나갔다고 하시는 게다. 얼마나 있으면 다시 입고 될 수 있을까 여쭤보았지만 희귀한 영화라서 기약이 없다는 말만 들을 수 있었다. 아픈 마음을 접어두고 오랜만에 들른 김에 매장을 둘러보았다.
다른 곳에서는 찾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성형미인-장일호 감독> <영마 (원제:영노-이성구 감독)> <목없는 여살인마-김영환 감독> 등을 발견 할 수 있었다. 이런 작품들은 정말이지 구하기 힘든 희귀작이다. 이 곳은 사장님만의 노하우를 통해서 작품들이 철저하게 잘 정리되어 있으며 한국에서 구할 수 없는 작품들 같은 경우에는 외국에서 수입을 해서라도 보유하고 있어, 처음 방문한 이들은 자료의 방대함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결국, 사장님이 선물이라면서 주신 <아들을 동반한 검객> 테잎을 들고 매장을 나섰다. 이렇게 되면 <괴시> 를 찾는 것은 사실 상 불가능해진 것 같다. 이대로 실패란 말인가..

<괴시>는 표절작?
기회는 엉뚱한 곳에서 찾아 왔다. '청춘극장' 에서 <괴시> 의 테잎을 구입해 간 사람이 본인과 가까운 벗이라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 것이다. 이런 황망한 일이 있나. '바닥이 좁다' 라는 말은 이럴때 실감이 간다. 친구를 닥달해서 <괴시>를 입수 할 수 있었다. 테잎을 받아 드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영화는 해충을 박멸하기 위해서 개발된 기계의 영향으로 시체들이 살아나 인간들을 공격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감상하는 내내 아무래도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없다. 방 한켠의 DVD 들을 뒤척이다가 드디어 그 원인을 알아챘다. Jorge Grau 감독의 74년도 작품
생각해 보면 당시의 한국 영화들 중에서는 표절 작품이 상당 수 존재했다. 이것은 물론 수입 쿼터를 따내기 위해서 무분별하게 영화를 찍어내는 과정에서 발생한 부작용이었다. 잘 알려져있듯이, 김기덕 감독의 <맨발의 청춘> 도 알고 보면 일본 영화의 심각한 표절작이다. 하지만 몇몇 표절작들 때문에 폄하시키기에는 보석과도 같은 한국 고전 영화들이 너무나도 많다. 결국 이번 미션은 간간히 들려오던 '한국 최초의 좀비 영화 <괴시> 가 사실은 표절작이더라' 라는 소문이 사실이라는 것을 실증한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괴시> 를 찾아다니면서 목격했던 청계천의 쓸쓸한 모습들은 '비디오 테잎' 이라는 이 오래된 미디어의 운명과도 맞닿아있는 듯 했다. 오래된 것들은 언젠가는 청산되고 새로운 것이 그 자리를 메꾸기 마련이다. 하지만 친구 처럼 아늑했던 과거와의 이별은 늘 눈두덕을 무겁게 만든다. 항상 그 자리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이제는 낡은 사진첩의 고색 창연한 필름으로 남고 말았다. 새로운 것에 대한 갈망에 못지 않게, 오래된 것들을 잊지 않고 보존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 또한 필요한 때가 아닌가 싶다.
이번 기획 기사를 계기로 많은 사람들이 고전 한국 호러물에 관심을 가질 수 있게 되길 진심으로 갈망한다. 참고로 10월 말경에 호러타임즈(http://horrortimes.net/) 에서 한국 호러 영화 상영회를 개최할 예정이니 뜻 있는 분들은 방문해보시길 권한다.
[ozzyz] 허지웅 ⓒ
이 글은 <아트앤리빙> 가을호와 <오마이뉴스> 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덧글
말쓰걸 2004/10/22 23:05 # 답글
상당히 흥미로운 글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표절이라고 해도, '강원도' 좀비 영화의 실체가 엄청 궁금해지네요.그럴껄 2004/11/09 17:47 # 삭제 답글
표절은 표절이고 주옥은 주옥이지 않을까요? 표절로 폄훼되는 주옥같은 작품이 아깝다는 말은 공감합니다만 양심을 팔아먹은 행동에 대해서까지 면죄부를 주고 싶지는 않습니다. ㅡㅡ;; 제가 너무 원론적으로 따진건가요?ozzyz 2004/11/09 17:59 # 답글
그럴껄/ 제가 항상 아쉬운 것은 본말의 전도와도 같은 '발췌'의 맹점입니다. 본문 어디에도 그런 말은 없을뿐더러, 그렇게 발언하고 싶은 마음 또한 없습니다.굳이 말하자면, <하지만 몇몇 표절작들 때문에 폄하시키기에는 보석과도 같은 한국 고전 영화들이 너무나도 많다> 이라는 부분이 있는데, 이것은 일부 표절작들 때문에 전체를 왜곡할 수는 없다는 의미일뿐 '표절작이지만 주옥같다'라는 말과는 전혀 동떨어진 의도입니다.
기사를 깊게 읽어주신점 감사드리지만, 아쉬움이 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