록키, 버티어내는 삶의 숭고함

가까이 두고 몇 번을 되풀이해 보게 되는 영화가 있다. 만인이 인정하는 걸작은 아니더라도 유독 내게만은 각별해서 볼 때마다 모든 프레임의 결에 뺨을 부비고 어루만지듯 소중히 곱씹게 되는, 그런 영화 말이다. 내게도 그런 영화가 몇 편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록키>다. 짧은 연휴를 이용해 <록키> 시리즈를 다시 보았다.



<록키>가 실베스타 스탤론의 자전적인 영화라는 건 더 말하고 말게 없는 사실이다. 스탤론은 억울했다. 천덕꾸러기로 손가락질 당하며 서른 살이 되도록 뚜렷한 직업도 없이 바닥에 웅크려있었지만, 스스로는 그보다 나은 사람이라는 걸 믿고 있었다. 당신들의 생각만큼 쓰레기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래서 증명하려 했다. 그래서 <록키>의 시나리오를 썼다. 그래서 주위의 만류와 회유에도 불구하고 직접 록키 발보아를 연기했다.

<록키>에서 무명의 발보아가 챔피언 아폴로와의 경기를 앞두고 애드리언에게 말한다. “시합에서 져도, 머리가 터져버려도 상관없어. 15회까지 버티기만 하면 돼. 아무도 거기까지 가본 적이 없거든. 종소리가 울릴 때까지 두 발로 서 있으면, 그건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뭔가를 이뤄낸 순간이 될 거야.” 많은 사람들이 발보아가 경기에서 이긴 것으로 기억한다. 그는 졌다. 그러나 진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그는 15라운드를 끝내 버텼고, 그렇게 자신을 입증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한 편의 영화를 수년에 걸쳐 여러 번 보면서, 우리는 영화와 함께 나이 들어간다는 문장의 의미에 다가설 수 있게 된다. 그 영화를 처음 볼 때 가졌던 내 삶의 맥락과 열 번째 볼 때의 맥락이 다르고, 이 맥락은 스크린 위에 고스란히 겹쳐진다. 그때마다 다른 생각과 격정을 품고 이미지와 대사와 표정을 읽어낼 수 있다.

전에는 록키라는 캐릭터가 스탤론이라는 배우와 영향을 주고받으며 30년에 걸쳐(<록키>가 서른 살 때, <록키 발보아>가 예순 살 때 영화다) 그를 끝내 구원해내는 과정이 흥미롭게 느껴졌다. 이번에는 달랐다. 새삼, 버티어낸다는 행위의 숭고함에 대해 환기하게 되었다. 덕분에 좀체 마음에 들지 않았던 3편부터 5편까지의 이야기마저 마음에 와 닿았다. 이 모든 건 결국 스탤론 혹은 발보아라는 개인이 하나의 세계에 맞서 끊임없이 스스로를 증명하고 버티어낸 역사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인생의 좌표라는, 그 단어부터 너무나 거대해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는 세상의 말에 더 이상 무심할 수 없는 나이에 닿아가면서, 결국 버티어내는 것만이 유일하게 선택 가능하되 가장 어려운 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기는 것도, 좀 더 많이 거머쥐는 것도 아닌 세상사에 맞서 자신을 지키고 버티어내는 것. 록키 발보아가 그랬듯이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영화와 함께 나이 들어간다. 허지웅 (일간스포츠 '허지웅의 불량문화')

관련 글: 록키는 어떻게 스탤론을 구원했나


트랙백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TrackbackURL : http://ozzyz.egloos.com/tb/4248760 [도움말]

핑백

덧글

  • koolkat 2009/10/05 13:22 # 삭제 답글

    정말 좋은 영화였죠. 다 부어터진 눈두덩으로 애타게 에이드리언을 찾는 그 모습이 진정 좋았었습니다.
  • 베리배드씽 2009/10/05 13:39 # 답글

    흔한 말로 강한 자가 살아 남는 게 아니라 살아 남는 자가 강하다고 하죠. 좋아하는 책이나 영화를 다시금 들춰볼 때마다 내가 얼마나 정서적으로 성장. 변화했는지 가늠해보곤 해요.
  • leopord 2009/10/05 15:05 # 답글

    견디어내기의 어려움 이전에, 스스로 견디어내보려고 노력은 했는가를 생각하게 되는 요즘입니다.
  • 유노윤아 2009/10/05 18:33 # 답글

    정말 명작입니다. 4편의 지나친 국가주의도 제겐 별로 거슬리지 않았습니다. 록키 개인의 의지 표명이란 데에 중점을 두고 보았거든요.
  • 랑새 2009/10/05 20:13 # 답글

    으아. 포스터 정말 멋지다.
  • 샤린로즈 2009/10/05 21:35 # 답글

    록키 명작이죠 ! 맞으면서도 돌진하는 황소 같은 모습이 .. 캬!
  • 2009/10/05 22:05 # 삭제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
  • 리플리 2009/10/05 23:28 # 답글

    개인적으로 굉장히 위로가 되는 따뜻한 글이네요.
  • 나름대로 2009/10/05 23:36 # 답글

    http://dvdprime.paran.com/dvdmovie/DVDDetail_Sub.asp?dvd_id=1560&master_id=13

    http://dvdprime.paran.com/dvdmovie/DVDDetail_Sub.asp?dvd_id=1588&master_id=13

    스텔론의 삶이 녹아든 영화였던 탓에, 영화 리뷰에서도 감동을 느낄 수가 있더군요.
    문득 생각나서 다른 분들도 한번 보시라고 링크 올립니다...^^;
  • 그림자 2009/10/06 00:28 # 삭제

    저는 링크해주신 글보다 허지웅씨가 <록키 발보아> 개봉당시 썼던 기사가 더 마음을 울리더군요.

    http://ozzyz.egloos.com/2998111/
  • 그림자 2009/10/06 00:28 # 삭제

    아, 본글에 이미 링크돼있군요;;
  • 감사 2009/10/06 03:37 # 삭제

    흥미진진하고 감동적인 내용이었습니다. 나름대로님과 김정대님께 감사드린다는 말 밖에 전해 드릴게 없네요. 그 많은 자료와 사진은 어떻게 구해서 정리했는지 입이 쩍 벌어집니다. 이런 건 돈 내고 봐야 하는건데. 미안한 마음이 드네요. 좋은 사이트 알려 주셔서 좋은 글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 미스티 2009/10/06 01:29 # 삭제 답글

    제게 그런 영화는 '밀리언달러베이비'에요.
    메기랑 프랭키만 생각하면...
    특히 메기의 삶을 단순히 불행하다고 이야기 하기엔 그녀의 꿈과 열정 그리고 선택이 뭉클한.
    저도 그녀처럼 용기있고 제대로된 삶을 살고 싶거든요. 늘 겁쟁이처럼 조금은 숨고 참고 있는 삶에서
    이 영화 보면 어떻게 사는게 제대로 사는 것이다. 라고 느껴집니다.
    그럴 줄 알면서도 괴롭고 힘들고 고통스러울줄 알면서도 자신의 일과 생을 묵묵히 견디는 사람들은
    늘 커다란 감동을 주죠.
  • 도시조 2009/10/06 02:35 # 답글

    Eyes of Tiger 는 명곡이죠. 개인적으로 록키 발보아가 맘에 들었습니다. 복싱 연맹에서 항의하는 록키의 모습은 참 감동이었어요.
  • 2009/10/06 02:56 #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
  • Lesion 2009/10/06 02:57 # 답글

    록키. 내 인생 최고의 영화이자 최고의 남자 영화.

    단지 다작이라는 이유 때문에 록키라는 이름의 가치가 떨어진 것이 안타까울 뿐.


  • 댕구리 2009/10/06 06:28 # 답글

    영화와 함께 나이 들어간다 말, 참 좋네요^^
  • zerin 2009/10/06 12:29 # 삭제 답글

    그 OST 다들 생각나시죠? 어렸을 때 록키..하면 다들 떠올리곤 하던....다시 한번 힘내서 오늘도 살아가고 싶네요. 잘 봤습니다.
  • 巨人 2009/10/06 12:48 # 답글

    그러고 보면 이번 추석때 개인적으로 각별하게 생각하는 영화를 못본게 아쉽군요.
  • 츄이 2009/10/07 23:05 # 답글

    록키..
    솔직히 한 번도 못 봤는데..
    꼭 봐야겠네요..

    '종소리가 울릴 때까지 두 발로 서 있는다..'
    맘에 와 닿는 말이네요.
  • 구름 2009/10/08 03:51 # 삭제 답글

    실베스타 스텔론이 서른 즈음에 록키를 이루어냈던 것이군요.
    허지웅님이 가까이두고 곱씹어보던 록키에 대해 이제서야 얘기를 꺼내는 이유를 알겠습니다.
    버티어내야겠지요. 모두.


  • sang 2009/10/11 23:54 # 답글

    가장 어려운 일이라는 것은 .. 미처 생각지 못했었던 것 같아요. 알고 있는데 모르고 있었던 것 같은 거요.

    버티고 견디는 게 그래서 힘든 건가봅니다.
덧글 입력 영역

와이드 위젯2


4개짜리 애드센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