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 트렉: 더 비기닝과 J. J. 에이브람스

J. J. 에이브람스는 흥미로운 감독이다. <클로버필드>의 괴물과 <미션 임파서블 3>의 토끼발과 <로스트>의 달마 이니셔티브와 <프린지>의 ZFT가 모두 연관되어 있는 거대한 고리라고 가정해보는 공상은 언제나 즐겁고 유쾌한 작업이다. 실제 에이브람스 스스로 그렇게 연관지을만한 혐의들을 작품 여기저기에 흩뿌려놓고, 심지어 <클로버필드>의 도입부에 <로스트>의 달마 이니셔티브 로고를 삽입하는 식으로 음모론을 확대시킨다. 물론 그가 처음부터 끝까지 이 모든 걸 계획하고 실행한다 확신하는 건 일종의 넌센스다(물론 재미는 있지만). 그보다 에이브람스는 TV와 영화, 인터넷을 기반으로 하는 자신의 기획물들을 최대한 활용해 양방향의 아이디어를 실험하고 차용하고 인용한다는 생각이다. <클로버필드>의 괴물과 <로스트>의 달마 이니셔티브 사이의 관계는 <클로버필드 2>가 나온다 하더라도 밝혀지지 않을 거다. <프린지>의 공간 이동과 <로스트>의 시간 여행 사이 관계 또한 마찬가지로 언제까지나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을 거다. 해외의 온갖 잡동사니 뉴스 그룹을 일일이 구독하며 달마 이니셔티브가 어떻게 세계를 정복했는가, 따위 글 부스러기를 탐독하더라도, 그걸 헤집는 일 자체가 유희고 자극일 뿐 해답 따윈 없다. 에이브람스는 단지, 어느 쪽이 더 재미있고 흥미로울 수 있을지 고민할 뿐이다. 이미 진행되고 있는 프로젝트 안에서 다음 프로젝트의 중요한 모티브와 소재를 실험하고, 혹은 다음 프로젝트에 관한 상상력을 자극하기 위해 이전 프로젝트의 잔상을 겹쳐놓는 식으로, 에이브람스는 관객의 혼을 쏙 빼놓는다.


<스타 트렉: 더 비기닝>은 두 말 할 나위 없이 참 잘 만들어진 오락물인 동시에, 팬덤층과 비 팬덤층을 고루 아울러 만족시키면서 <스타 트렉>의 역사를 재부팅시킬 수 있는 매우 적절한 방아쇠다. 열쇠는 시간 여행이다. 시간 여행을 다룬 영화는, 그 영화들 속에서 죽어나가는 사람들 숫자보다 곱절 이상 많다. 그러나 그 정신 나간 소재를 영리하게 활용하는 영화는 많지 않다. <스타 트렉: 더 비기닝>은 후자다. 커크가 그리 빨리 선장이 됐을 리 없다고 항변하거나, 엔터프라이즈호가 그 시기에 건조되었을 리 없다고 투덜대는 것, 그 시간대의 워프 기술이 그리 정교할 수 없다고 짜증내거나, 니모이 버전보다 좀 더 뜨거운 체온을 가지고 있는 퀸토 버전 스포크가 원작을 무시했다고 얼굴 붉히는 일 따윈 애초 불가능하다. 시간여행으로 인해 모든 게 새롭게 출발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던 <스타 트렉>의 세계관은 온전히 뒤틀렸다. 매우 끌리는 방식으로.

공교롭게도, 혹은 너무나 에이브람스적이게도, 시간 여행은 최근 두 개 시즌 동안 <로스트>가 가장 천착하고 있는 소재이기도 하다. 에이브람스는 <로스트> 안에서 <터미네이터> <빽 투더 퓨쳐> 딜레마, 즉 과거가 바뀌면 미래도 함께 바뀌는 것인가, 혹은 <레트로엑티브> 딜레마, 과거에 일어난 일의 결과는 시간을 역류하더라도 결코 바뀔 수 없는 것인가, 등의 질문들을 진행형으로 끊임없이 반복하고 발전시켜 왔다. 에이브람스가 <스타 트렉: 더 비기닝>의 아이디어를 <로스트>를 통해 실험하고 있다는 추측에는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가장 최근 방영된 <로스트> 5시즌 14 에피소드에는 <스타 트렉: 더 비기닝>의 개봉을 자축하는 화면이 들어있다. 다시 확신하건대, J. J. 에이브람스는 흥미로운 감독이다. 더불어, 자기가 보고 싶은 걸 돈 받고 사랑 받아 가며 충분히 즐기고 있다는 점에서, 가장 부러운 창작자다. 물론 지금 이 시간대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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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J. Abrams의 강연 2009/05/03 23:25 #

    참 재치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게다가 귀여움 ㄷㄷㄷ최고의 웃음포인트는 "테드에서 울어도되나요?"... more

  • 스타트렉(Star Trek,2009) 2009/05/05 13:19 #

    짧게 핵심만 말하자면(요즘은 매 포스팅이 그렇지만) J.J.에이브람스 감독은 역시 다른 감독들보다 약간 더 재능있고 영화는 이번에도 훌륭했다. 오늘 우연히 시사회 자리가 생겨서 회사에서...... more

  • 스타트렉(2009) 2009/05/05 14:19 #

    23세기의 미래, 조사임무를 수행 중이던 스타플릿 우주선 U.S.S.켈빈호의 앞에 갑작스런 우주폭풍과 함께 거대한 송곳형의 인공물체가 나타난다. 무차별 공격으로 켈빈호를 꼼짝 못하게 만든 그 물체의 조종자는 켈빈호의 선장에게 직접 건너와서 협상할 것을 제의한다. 결국 선장은 예상대로 살해당하지만, 일등항해사 조지 커크는 켈빈호의 선장대리로서 승무원을 탈출시키고 자기는 정체불명의 적을 저지하기 위해 명예로운 죽음을 택한다. 사랑하는 아내와 갓 태...... more

  • 하이퍼텍스트의 제왕, J.J. 에이브람스 2009/05/09 19:34 #

    을 봤다. 입이 떡 벌어진다. 에이브람스가 만들어낸 사운드와 영상의 절묘한 스펙타클도 놀랍지만 자신이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를 이렇게 많은 텍스트에 동시다발적으로 투하시킬 수 있는 그의 뚝심에 더욱 놀랐다. 은 시간과 공간을 거슬러 오르는 영화다. 사람은 물론이고 우주선마저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여기저기 이동해 다닌다. 재밌는 건 그가 이와 같은 이야기를 펼쳐내는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more

  • <스타트렉: 더 비기닝>. 새로운 스타트랙의 훌륭한 시작 2009/05/09 22:32 #

    어렸을 적 주말에서 스타트렉을 꽤 재밌게 봤던 기억이 있다. 우주선의 광속 비행과 순간이동은 어린 나에게 있어 최고의 흥미거리였다. 하지만 그 시절에는 지금처럼 미드를 언제든지 원하는 때에 볼 수가 없었기 때문에, 수많은 스타트렉의 시리즈를 보는 것은 불가능했다. 스타트렉은 그동안 총 5개의 TV 시리즈를 통해 725편이 방영되었고 11개의 극장판이 나왔다고 한다(스타트렉의 시리즈들과 그 영향에 대한 이야기는 페니웨이님의 글들을 참고). ...... more

  • 스타트렉: 더 비기닝 - 프리퀄을 가장한 씨퀄, 그리고 성공적인 리부트 2009/05/11 23:40 #

    이제는 프리퀄이 대세다. 조지 루카스는 자신의 야심작 [스타워즈]를 프리퀄을 통해 완성시켰고, 유치함의 나락으로 떨어졌던 배트맨은 프리퀄로 돌아간 덕분에 [다크 나이트] 같은 아트 블록버스터로 환골탈태할 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무려 20여편의 작품을 통해 긴 생명력을 자랑했던 제임스 본드는 진부함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설정파괴를 무릅쓰고 프리퀄을 선택했다. 최근에는 엑스맨의 행동대장, 울버린도 프리퀄로 탄생했다. 이처럼 헐리우드 시리즈...... more

  • 신극장판 스타트렉의 비밀을 밝힌다! (3) 2009/06/14 18:38 #

    ■ 에이브럼스 관련 떡밥 ○ 어린 커크가 차를 몰고 질주하는 장면에서 전화 목소리로 잠깐 등장하는 커크의 새아버지는 그레그 그룬버그가 연기. (그 전에 촬영되었던 새아버지 등장 장면에서는 다른 배우가 그 역을 맡았으나 최종 편집에서 삭제됨) 그룬버그는 에이브람스 감독의 오랜 친구로 TV시리즈 『펠리시티』 및 『엘리어스』에서 레귤러로 출연했고 그밖에도 에이브람스의 여러 프로젝트에 단역으로 나온 바 있다. 에이브람스와는 무관하지만 TV시리즈...... more

덧글

  • 순진찌니 2009/05/03 21:48 # 삭제 답글

    헛.. 살다보니 이런일이..

    거세 허지웅선생의 책을 감명깊게 읽고(저도 어무이를 유순씨라 부르기 시작했다오)

    블러그에 들락거린지 1달만에 일빠를 할줄이야..

    우햐햐햐.. 오늘은 일진이 좋구려..

    그렇다 하여도.. 전 스타트랙은 너무 양키냄새 나서 싫다는...
  • 지니가다 2009/05/03 21:51 # 삭제 답글

    참으로 기대됩니다, 시리즈물에 대한 간략한 이해와 기본적인 배경 정보를 공부해뒀는데 도움이 될 거라 믿습니다. 기존 스타트렉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보면 내용의 이해도가 떨어진다고 누가 그러기에;;

    노잉을 워낙에 좋게 봤었는데 허지웅 기자님과 취향이 묘하게 맞는 듯해요 ㅎ
    클로버필드도 되게 괜찮게 봤었고... 왓치맨도.... 스피드 레이서도.... 단 박쥐는 저랑 의견이 좀 갈리네요.
    나름의 장점, 미덕에 대해서 얘기하시기는 했지만... 그러고보니 박쥐평 기대돼요 ㅎ

    아... 스타트렉 첫날 바로 뛰어가서 봐야지 ㅋ ㅋ

  • belle 2009/05/03 23:16 # 답글

    황금광시대 중 윤성호 감독 작품에 자기가 나오더라. 깜짝 놀랐다는...연기 좀 되던걸요...차가 아주 많이 막히는 고행의 전주길에서 귀환. 출근 준비...^^
  • Sole 2009/05/04 14:34 # 삭제

    저도 봤어요! 개막식때는 못보고 어제 상영 때 봤음. 연기 잘 하시던데요? 아주 빵 터졌어요. 재밌었음 ㅎㅎ
  • 2009/05/03 23:25 #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
  • 봉봉 2009/05/04 00:16 # 삭제 답글

    음 일단은
    AFKN을 보며 키스신 같이 말랑말랑한 것이 언제쯤 나올까 하던 기억이 나는 스타트랙.
  • leopord 2009/05/04 01:28 # 답글

    영리한 영화인 건 확실한 듯 합니다. 전주 잘 다녀오셨겠지요. 부럽습니다.
  • cutnpaste 2009/05/04 01:54 # 삭제 답글

    요즘 로스트 더욱 더 흥미진진해지고 있고!
    프린지 역시 재미를 날로 더해 가고!

    연결고리가 있던 없던,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참 재미있고!
  • 부적응자 2009/05/04 11:54 # 답글

    SF를 참 좋아하는데, 공교롭게도 스타트랙 TV 시리즈는 본 적이 없습니다. 고로 아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데, 극장판 보아도 괜찮을까요?
  • ozzyz 2009/05/04 12:01 #

    네. 오리지널 시리즈 극장판이라도 보고 가시면 더 좋겠지만 별 상관 없습니다.
  • 2009/05/05 00:38 #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
  • 잠본이 2009/05/05 14:23 # 답글

    커헉 로스트의 O자에서 엔터프라이즈가 (...)
    에이브럼스감독 영화는 이번이 처음이지만 참 센스쟁이인 듯 합니다.
  • 그라드 2009/05/08 16:11 # 답글

    영화를 보고 난 뒤에 시간여행이란 테마를 정말 잘 썼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더불어 이 글도 100%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재밌게 봤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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