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포동 김갑수씨의 사정

세상일이라는 게 참 별 볼 일 없는 농담 한 줌이라는 걸, 별 볼 일 없는 무대 위의 별 볼 일 없는 만담가가 내뱉은 그저 그런 꽁트 같은 것이라는 걸, 그러니까,

아주 가끔 깨닫고 대개 까먹는다.

이를테면 개포동 사는 김갑수씨의 사정이 그렇다. 내 기억 속의 갑수씨는 지나간 옛사랑을 잊지 못해 촛불처럼 떨어대며 주접을 부리는 사내였다. 그는 옛사랑을 어렵게 떠나보내고 6개월 동안 무려 여덟 번의 연애를 휘몰아치듯 해치웠다. 사람은 사람으로 잊어야 한다는 주위의 강권 탓이었다. 귀가 얇은 갑수씨는 그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여자사냥의 귀재마냥 행동했다. 작년 여름 오랜만에 마주쳤을 때 그는 3명의 여자를 동시에 만나고 있었다. 그 가운데 한 명은 띠동갑이었다. 과연 골드만삭스적인 연애라 우리는 갑수씨를 월스트리트 황소동상 보듯 하였다. 부러웠지만 콱 성병이나 걸려버려라, 비웃으며 그의 고추를 연민하기도 하였다. 소문에는 정말 성병에 걸렸던 거 같은데. 남자에게는 증상이 없는데 여자에게만 증상이 나타나는, 그야말로 성차별적인 성병이라나 뭐라나.

아무튼 그런 그가 뒤늦게 이성을 잡아 차린 건 구로동의 최말자를 만나고 나서였다. 만나자마자 결혼신고부터 하자고 졸라댔다는 말자씨는 거짓말을 밥 먹듯 하고 신뢰를 져버리길 아침에 똥 싸듯 하다가 결국 갑수씨로부터 이별 통보를 받았다. 전해 듣기론 이후가 더 가관이었는데 눈앞에서 칼로 자해를 하지 않나, 딱 한 번 본 갑수씨 친구들에게 새벽녘 전화해 “내가 어젯밤 고양이를 죽였다,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겠다, 그런데 이 모든 건 갑수씨 귀에 들어가라고 하는 이야기는 아니다”라는 이야기를 늘어놓지 않나, 자해했을 때 썼던 문구용 칼을 갑수씨 방 한가운데 던져놓고 가지를 않나, 그런 식이었나 보다. 갑수씨는 “내가 지나간 옛사랑에게 얼마나 사무치게 쌍놈이라 하늘의 분노를 샀으면, 이제와 이런 쌍년을 만나 개고생을 하느냐”며 소 같이 울어대곤 하였다. 갑수씨는 이후로도 몇 번의 연애를 더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집중을 못하겠다더라. 골드만삭스적 연애는 부도를 맞고 쓰러졌다.

몇 달 만에 다시 만난, 나보다 더 말라버린 제3세계 갑수씨가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지나간 옛사랑에게 몇 주 전 뜬금없이 문자가 왔단다. 갑수씨도 이제 좋은 사람 만나세요. 갑수씨의 마음은 터질 듯 요동쳤다. 그건 당신이 이미 좋은 사람을 만나고 있다는 말인가요? 답문이 도착했다. 좋은 사람을 만나고 있어요, 저를 울리지 않는 사람이에요. 갑수씨는 그날 밤 소주 세 병을 연달아 쳐 마시고 발가벗은 채 개포동의 밤거리를 달리다 전봇대에 이마를 박아대며 구슬피 울었다고 한다. 나는 그 구질구질한 광경을 눈으로 보지 못해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일이 있은지 며칠 후, 입이 돌아갈 때까지 술을 들이마신 갑수씨가 그야말로 충동적으로, 아 정말 해서는 안될 일을, 그러니까 옛사랑의 싸이 홈피에 들어가 보았단다. 갑수씨를 의식하는 건지 아주 오랫동안 업데이트가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재수가 없으려면 모로 가도 그렇다고, 갑수씨는 왼쪽 상단의 자그마한 기분 아이콘을 보고 끝내 절규하고야 말았다. 글쎄, 무려 ‘황홀’이었다고. 황홀. 행복도 아니고 그러니까 황홀. 황홀해서 새벽까지? 뭘 어떻게 하길래 황홀이래 글쎄, 그런 말을 퍼부어대며 나는 낄낄거리고 좋아했다. 나의 웃는 모습을 보는 갑수씨의 얼굴은, 놀랍게도 한결 평안해보였다. 그 모든 지옥이 사실 별 거 아니라는 자기 확인이 필요했는지.

그래서, 남의 독한 사정도 듣다 보면 결국 농담 같은 것이다. 이걸 마음에 구겨넣어 체험처럼 간직할 수 있다면 좋을 일이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이런 건 가끔 깨닫고 대개 까먹고야 마는 것이다. 내가 나중에 저런 독한 일을 겪게 되거나, 그런 일로 괴물이 되고 나면, 내 불우한 사정 이야기로 갑수씨나 웃겨주어야 겠다. 갑수씨에게는 듣기 재미있는 농담일 것이다. 웃는 갑수씨를 보면 나도 좋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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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February 2009/03/05 21:59 # 답글

    오늘 시사인에 실린 최양락씨 관련 글을 읽고 오는 길인데, 블로그에 접속했더니 '지금'이라는 글씨가 신기해 보이는 데다, 이 블로그에 덧글(0)인 순간을 접한 것은 처음이라서, 덧글 달아보았습니다.
  • duvet 2009/03/05 22:21 # 답글

    ㅎㅎㅎ연애얘기는 늘 재밌어요.
  • 웃자 그리고 날자 2009/03/05 22:25 # 삭제 답글

    모든 지옥이 사실 별거아니고 심각한 고민도 설사앞에서는 맥을 못추는......^^
    대한민국표류기를 재미있게 봤습니다 그리고 덕분에 아날로그맨도 오늘 지하철에서 슬며시 웃어가며
    재미있게 봤습니다. 허지웅씨랑 달리 글재주가 없어서 짧게 쓰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2009/03/05 22:26 # 삭제 답글

    ㅋ본인얘기 아니죠?
  • ozzyz 2009/03/05 22:33 #

    김갑수씨가 지켜보고 계십니다.
  • 미도리 2009/03/05 23:53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놔 기절하겠어요
  • 체리씨 2009/03/05 23:57 #

    어헉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최말자측근 2009/03/06 00:30 # 삭제

    본인 얘기라는 데 500원 걸겠습니다
  • 저도팬 2009/03/06 17:50 # 삭제

    여기도 500원 걸어요~
  • 2009/03/05 23:17 #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
  • R 2009/03/05 23:38 # 삭제 답글

    빨리 소설 써주세요 :)
  • 박지원 2009/03/06 12:48 # 삭제 답글

    갑수씨를 만나보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허지웅씨보다 마른 남자는 당최... 상상이...
  • ozzyz 2009/03/06 13:24 #

    지금 한민관씨 무시하시나효?
  • 박지원 2009/03/07 00:34 # 삭제

    ... 그렇군요.^^;
  • 익명 2009/03/06 13:18 # 삭제 답글

    와, 제 얘기인 줄 알고 찔끔했네요;
  • 시계바늘 2009/03/06 13:30 # 삭제 답글

    으하하하
  • 으흐흐 2009/03/06 21:24 # 삭제 답글

    지나간 옛사랑에게 얼마나 사무치게 쌍놈이라 하늘의 분노를 샀으면ㄲㄲㄲㄲㄲㄲㄲㄲㄲㄲㄲㄲㄲㄲㄲ
  • 수요 2009/03/06 23:03 # 삭제 답글

    아이고 ㅋㅋ 불구경 쌈구경 연애구경이 젤 재밌음
  • 루미 2009/03/07 00:30 # 답글

    오밤중에 우연히 눌러봤다가 즐겁게 웃고 나갑니다^^
  • 하지마 2009/03/07 13:03 # 삭제 답글

    내 얘기같아서 슬프다...
    그러나 저런 말종여자 걸리기 전에 끝난게 다행이지
  • 으헤헤 2009/03/07 21:47 # 삭제 답글

    아~~~~ 배야~~~ 웃겨요~ 오밤중에 혼저 ㅋㅋㅋㅋㅋㅋㅋ미쳐부러~
  • 복수의 물결 2009/03/08 02:01 # 삭제 답글

    한참 술자리에서 신세한탄을 늘어놓다 당사자인 나보다 더 진지해지는 친구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저 그런 기분이 들더군요.
  • ㅁㄴㅇㄹ 2009/03/08 22:33 # 삭제 답글



    맞아요. 지옥인 동시에 하나의 거대한 농담이죠.........
  • egoing 2009/03/09 00:18 # 삭제 답글

    아 정말 슬픈 사랑이야기내요. 글이 정말 좋습니다. ^^
  • 타락천사 2009/03/09 03:06 # 삭제 답글

    빨리 <와치맨> 리뷰 써주세요 ㅋㅋ
  • Elgatoazul 2009/03/09 05:39 # 답글

    김갑수씨 미안해요. 하지만 너무 재미있어요...
  • ㅎㅂㄱ 2009/03/10 13:26 # 삭제 답글

    마감이신덧 글이 안올라옴니다!
  • GROOVY 2009/03/10 17:14 # 삭제 답글

    ㅋㅋ 아~ 정말 갑수씨가 이 글을 보고 계시다면 죄송하지만, 시원하게 웃었습니다~!
    옛 애인의 홈피... 하지말아야할 일이지만, 꼭 하게 되는...ㅠㅁㅠ
  • 델피 2009/03/17 10:24 # 삭제 답글

    ㅇ ㅏ ㅎ ㅏ ㅎ ㅏ ㅎ ㅏ ㅎ ㅏ ㅎ ㅏ ㅎ ㅏ ㅎ ㅏ ㅎ ㅏ ㅎ ㅏ!!

    처음 보자 마자 웃었고, 다시 한번 보고 포복절도했는데
    새삼 다시 보는데도 너무 웃깁니다. 웃기는 구절이 한두곳이 아니에요.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푸하하하하하하하하하-
  • 델피 2009/03/17 10:26 # 삭제 답글

    이렇게 웃을 수 있게해주니, 감사할 따름~ ^^♥
  • 지나가다 2009/03/25 22:49 # 삭제 답글

    내 주변 최말자는 자기는 요부랍시고 반경 100m이내 공간에 사는 모든 남자는 '자기 꺼' 라고 생각하는 한편.
    자기 주변 남자는 신촌에서 왕십리까지의 거리반경으로 남자 주위에 여자만 다가가도 남자 몰래 그 여자 찾아가서 개패대기 치는 여자였다는.................

    처음에 이해도 하려하고 이해가 안되니 비아냥도 대봤지만 그래봤자 그녀, 자기 칭찬한다고 아전인수격으로 확대해석하며 오히려 좋아 날뛰어대더라는.
    나중에 알고보니 그녀, 남자를 사귀려던 게 아니라 노예를 한마리 키우고 싶었대나 뭐래나.


    제 주변 최말자와 김갑수이야기랍니다~
  • SJ 2009/04/03 16:58 # 삭제 답글

    난 내 주변 어떤 여자때문에 '여성혐오'증에 걸릴 정도였습니다.
    모든 세상 여자가 다 저모양인가 싶고...
    사주를 봐도 남자보다 여자를 조심하라고 하고.(우습죠?)
    사주같은 거 무시해도 가는 데 마다 괴롭히니..

    이젠 좀 여자들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불필요한 연대도 할 필요없고, 모든 건 내 자신에서 부터 시작하고 끝나는 것 같습니다.

    난 내게 여성혐오증까지 안겨준 그녀가, 제발이지 정신 좀 차렸음 좋겠습니다.

    타인이 자기를 싫어한다면 '왜' 자기를 싫어하는지 그 이유, 정도는 납득하고
    같은 잘못을 했는데도 왜 남보다 자기가 더 욕을 먹어야 하는지.....

    그것조차도 모르는 사람이 타인과 관계하려 들면 안되겠지만.. 어쨌건,

    자기가 타인에대해 좋지 않게 생각하고 그것을 자기처럼 해석하려들면..
    한이 없다는 것도.

    근데, 인간은 누구나 자기 중심으로 자기 경험치만큼 생각하게 되어있는 존재인 듯합니다.
    애당초 소통이 불가능한 관계라는 것도 존재한다는 것도 깨닫게 되는 요즘입니다.

    ,라고 생각했는데..
    최말자는 어쩜
    그 상황 자체를 즐기는 여자인지도 모릅니다.
    타인과 소통이 아니라 자기가 주목받는 걸 즐기는 거 말이죠.
    욕이든 뭐든.
    ...

    그런 사람들은 타인이 자길 스토킹해주길 바라는 거죠.
    그거 나쁠 것 없습니다. 남에게 피해만 주지 않는다면 자신이 타인에게 스스로 욕먹는 걸 감당하면서 행동하는 것 그게 문제 될 건 아니라고 봅니다. 다만, 자신의 '목적'이외의 것을 욕심낸다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그 모든 것을 세상이 이해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시대착오적 발상일테죠..
    그런사람이 사람을 '가려'사귄다는 것도 어불성설이고...

    ..
    이래저래, 인간세상은 이해가 안되는 일이 참 많은데.
    전 최말자든 욕을 먹는 것조차 관심이라 생각하며 즐기는 사람이든 별 관심은 없고 다만, 전 이런 생각은 듭니다.
    어떤 경우든, -타인과 소통을 목적으로 하든, 주목 받는 것을 목적으로 하든-.
    자기가 '선택'을 해야하고, 그 선택에는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 말입니다.

    본문내용과 많이 다른 내용이네요.. 말이 길었습니다.

  • 김치전 2009/07/27 19:11 # 삭제 답글

    우울했는데 이 글 읽고 기분이 좋아졌어요.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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