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지웅의 키노키ㅣ눈먼 자들의 도시 - 도와주세요, 지도자도 장님입니다)
주제 사라마구의 원작을 영화화한 <눈먼 자들의 도시>는 영화만이 가질 수 있는 매력을 드러내는 데는 실패한 듯 보인다. 다만, 눈 뜨길 요구하는 작가의 고성은 우리들의 가까운 기억과 현실 속에서 여전히 유효하다.
고백하건대, 지쳤다. 심란하다. 굳이 예민하지 않은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역치가 무한대로 확장되는 마술적 경험이다. 이제는 대통령이 기획재정부 장관과 잤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성 싶다. 그에 투표하게 만든 욕망이 누구 것인데 이제와 누가 누굴 조롱하는 것도 질리고 재미없다. 이것이 과연 저 유명한 난세, 라는 것인가 싶어질 정도라 꼴 보기 싫은 뉴스를 피해 밖으로 나돈다. 무관심과 신선놀음이야 말로 난세를 버티어낼 척추라는 마음에 억지로 즐겁게 마트를 찾으면 1리터짜리 우유가 2400원에 팔리고 있다. 이제 더는 매일 아침 호랑이 힘이 솟아날 수 없다는 낭패감이 환율의 속도감으로 온 몸을 휩쓸고 나면 먹지도 보지도 화내지도 말고 시체처럼 대충 살자 싶다. 담배 연기인지 입김 때문인지 시야가 온통 희끄무레 쭉쭉하다. 희끄무레 쭉쭉.
<눈먼 자들의 도시>는 바로 그렇게 시야가 희끄무레 쭉쭉해져버린 사람들이 무더기로 나오는 영화다. 주제 사라마구의 원작이 그러했듯, 이것은 하나의 우화다. 우화는 이야기의 형식을 빌려 부조리를 풍자하고 바른 처세를 암시한다. 그렇다면 <눈먼 자들의 도시>는 무엇을 지적하고자 하는가. 원작의 텍스트는 극한의 상황에 내몰린 인간성과 그 회복을 중심으로 해독되어 왔다. 그러나 지금 시점에서 다시 한 번 영상으로 복기하는 <눈먼 자들의 도시>는 보는 이로 하여금 또 다른 생각에 가닿게 만든다. 우화란, 난세일수록 더 잘 눈에 드러나기 마련인 것이다.

<눈먼 자들의 도시>는 어느 날 갑자기 백색 실명 바이러스에 노출돼버린 도시를 그리고 있다. 통증도 없다. 징후도 없다. 갑자기 전염된다. 발병하고 나면 시야가 온통 하얗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백색 실명이라고 부른다. 정부는 군대를 동원해 최초 발병한 사람들을 임시로 급조된 수용소에 가두었다. 최초 발병자를 진료했던 의사도 여기 갇혔다. 그의 아내도 함께 갇혔다. 그러나 그녀는 어딘가 유별나다. 그녀는 눈이 멀지 않은 것이다. 눈이 멀지도 않았는데 남편을 혼자 보낼 수 없어 군인들을 속이고 따라왔다. 의사의 아내는 자신이 눈이 멀지 않았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는 범위 안에서 최선을 다해 사람들을 돕는다. 가장 걱정하는 건 의사다. 아내가 실명하지 않았음이 밝혀지면 수용소 내 모든 눈 먼 자들의 노예처럼 살게 될까봐 그렇다.
수용소의 상황은 날이 갈수록 나빠진다. 처음에도 나빴지만 이제는 지옥과도 같다. 복도는 넘쳐나는 배설물로 산을 이루고 식량은 늘 부족하고 냄새는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끔찍하다. 정부는 기하급수로 늘어나는 실명자들의 규모를 감당할 수 없다. 사방에 수용시설을 늘여보지만 속수무책이다. 진짜 문제는 수용소 내 악몽 같은 환경이다. 가두는 데만 급급했지 그 안에 수용된 사람들에 대한 처우와 진료 따위는 생각해볼 여유도 없었던 것이다.
군인들은 눈이 먼 자들에게서 공포를 느낀다. 전염될까봐 걱정이 태산이다. 군인들은 먹을 걸 요구하는 눈 먼 자들에게, 보이지 않아 줄을 이탈하는 눈 먼 자들에게, 의약품을 호소하는 눈 먼 자들에게 사격을 감행한다. 사람들이 죽는다. 그렇게 위태롭게나마 질서가 유지되는 듯 보인다. 그러나 두려움에 기반한 질서는 부패될 수밖에 없다.
급기야 수용소 내에서 무력을 통해 식량을 통제하겠다는 세력이 생겨난다. 이들은 군인들이 시간마다 수용소 마당에 대충 던져놓는 보급식량을 독점하고, 다른 눈 먼 자들로부터 돈과 여자를 요구하기 시작한다. 폭력과 식량 앞에, 눈 먼 자들은 무력하게 돈을 내놓는다. 더불어 눈 먼 여자들이 움직인다. 그렇게, 상황은 극단으로 치닫는다.
<시티 오브 갓> <콘스탄트 가드너>의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감독은 원작자 주제 사라마구로부터 판권을 얻어내기 위해 갖은 수고를 감수했다. 결과적으로 주제 사라마구는 영화의 만듦새에 크게 만족한 눈치다. 그러나 어쩌면 영화가 원작보다 뛰어나지 않아 안도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는 우화적 텍스트로서 생각해볼만한 주제들을 수 없이 제기하고 있지만 그 모두가 소설을 통해 더 깊게, 더 입체적으로 다뤄진 것들임을 상기하면 맥이 빠진다. 뜬금없는 내레이터의 등장은 이것이 진짜 메이렐레스의 의도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영화라는 형식만이 가질 수 있는 힘을 자진해 축소시킨다. 특히 겉핥기식의 수용소 묘사는 아쉬움을 배로 만든다. 애초 24부작 드라마에 더 어울리는 텍스트였는지 모른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는 원작과 무관하게 온전한 그 자신의 힘으로 이룩해내는 것이 단 한 가지도 없어 보인다. 제작자들은 이 영화가 원작의 재현극에 불과하다는 잔인한 비아냥을 이겨내야 할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눈 먼 자들의 도시>가 원작을 읽어볼 기회가 없었던 관객들에게 (비록 충분치 못하더라도) 세상과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우화적 쾌감을 제공해준다는 사실을 부정할 이유는 없을 것 같다.
<눈먼 자들의 도시>는 더할 수 없이 정치적인 우화다. 이 같은 혐의는 후속 소설 <눈뜬 자들의 도시>를 읽어보면 확연한 사실이 된다. <눈먼 자들의 도시> 속 눈 먼 자들은 막무가내로 체제 순응적이거나 화내야 할 때 화내지 못했던, 혹은 눈앞의 부조리에 필요 이상으로 비관과 자조, 무력감을 입에 물었던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이 텍스트를 만들어낸 자들은 독자를, 관객을, 땅을 딛고 서 태연히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을 눈이 먼 존재로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눈이 먼 자들은 잘못된 처우와 상황에 대항하는 방법으로 선의에 호소하는 쪽을 택한다. 먹을 것을 더 달라고, 적확하게 분배해달라고, 문명의 상식을 지켜달라고, 공정한 시스템을 구축해달라고 군인들의 선의에 호소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돌아오는 것은 한 줌의 조롱과 총알뿐이다. 선의에 기대는 것으로 시스템을 바꿀 수는 없다. 시스템을 지배하는 자들의 선의에 기대어 정의를 호소하는 건 해결책이 될 수 없다. 그들에게 선의가 있거나 말거나 적확한 분배가 정의가 필연적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는 시스템을 새로 만들어내야만, 해결이라는 것이 가능해진다. 선의를 부르짖기 시작하면 시스템의 권력은 더욱 강화될 뿐이다. <눈먼 자들의 도시> 속에선 시스템에 선의를 호소하다 지쳐버린 사람들이 결국 서로를 착취하고 물어뜯고 상처내고 먹어 치우는 상황까지 전개된다. 작가의 치밀한 풍자에 소름이 돋는다.
눈 먼 자들에게 새로운 전환점이 되는 건 수용소가 불에 타 없어지는 순간, 즉 기존의 시스템이 사라져버리는 순간이다. 그제야 눈 먼 자들은 수용소 밖의 세상이 모조리 눈이 멀었다는 걸 깨닫는다. 그리고 새로운 삶을 향해 발을 내딛는다. 물론 가시밭길이다. 그래도 내딛는다. 어찌됐든 살아남아야 한다. 주제 사라마구의 무정부주의적인 태도에 무조건적인 긍정을 보낼 순 없다. 그러나 문제가 있을 때 그 문제 안에서 건전한 상식의 회복을 요구하는 게 어리석기 짝이 없는 행동이라는 작가의 풍자는, 우리들에게 아주 가깝고 친숙한 공공의 기억 속에서, 충분한 설득력을 찾는다.
후속 소설 <눈뜬 자들의 도시>는 <눈먼 자들의 도시>의 백색 실명 바이러스가 해결된 4년 후의 풍경을 다룬다. 정부는 당시 무능력했던 자신들의 행동을 공공연히 지워냈다. 그러나 사람들은 다르다. 한 번 눈이 멀었다가, 다시 뜬 사람들에게 있어, 교훈은 각성으로 행동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고결한 선거가 있던 날, 대다수 사람들이 백지 투표를 낸다. 정부는 당황한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재선을 치른다. 이번에는 80퍼센트를 넘는 사람들이 백지 투표를 낸다. 소설은 이후 이어진 정부의 폭력과 눈 뜬 자들의 행동을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식으로 다루며 다시 한 번 흥미로운 이야기를 펼쳐낸다.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나. 스스로 눈을 감길 자청했던 우리들이 그렇게 할 수 있나. 장님을 지도자로 뽑아놓고 구덩이로 이끄는 그를 욕하는 우리들이, 그렇게 할 수 있나. 과연 어려운 노릇이다. 소설이나 영화와 달리, 눈 먼 자들이 절로 번쩍 눈을 뜨는 기적이 우리에게 가능할 리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우리는 우리 주위에 ‘의사의 아내’와 같은 자들을 가려내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 더불어 그들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한다. 비관을 떨쳐내고 적확하게 분노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으로선, 그 뿐이라는 심정이다. 글_ 허지웅 일러스트_ 장재훈 (<프리미어> '허지웅의 키노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