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반 지하방 그리고

누워 있다가 벽에 뺨이 닿았다. 잠이 오지 않아 길고 긴 밤. 벽은 벽인데 오늘따라 벽 같지 않다. 만져 보았다. 쓰다듬었다. 수천 번의 낮과 밤이 습기마냥 서려있다. 눅눅하진 않았다. 온기가 느껴졌다. 이 방을 공유했던 사람들을 떠올렸고 사건들을 환기했다. 고시원을 떠나 처음 이 방에 발을 들여놓았던 날이 생각났다. 하루 종일 취재를 하고 들어와 날이 밝도록 기사를 쓰던 날이 생각났다. 천정에 물이 스며들어와 유리 테이프를 붙여가며 밤새 골치를 썩었던 날이 생각났다. 하늘 아래 제일 밑바닥에 자리 잡은 생각들만 집어 들어 머리를 흔들고 때리던 날이 생각났다. 장마 내내 옷장 가득 곰팡이가 피어올라 신세를 저주했던 날이 생각났다. 욕심냈던 날들. 지루했던 날들. 가슴에 칼이 돋아났던 날들. 시작하고 싶지 않았던 날들. 끝내고 싶지 않았던 날들. 아 저 빨간 밥통은. 아 저 문지방의 철봉은. 아 저 벽걸이 에어컨은. 아 그리고. 사람이. 소소한 기억들은 살갑고 강인하다. 이 안에서 정말 많은 일이 있었구나, 새삼. 많이 웃었고 엉엉 울었고 발을 굴렀고 불안해 뒤틀렸고 행복해 뻐근했다. 더불어 어리석었다. 내일 아침 이 방을 떠난다. 다른 반 지하방으로 간다. 내 삶의 가장 강렬한 순간들을 함께했던 공간과의 마지막 밤이다. 가슴이 저리고 시원하다. 나는 내일 갈 거야. 너보다 잘나지도 않았어. 그냥 반 지하방이야. 그래도 나는 갈 거야. 덜 어리석겠다. 혹시 약이 오를까. 사람 같다.

반 지하방도 그 아이도. 나는 되게 못 생기게 눈썹이 아프도록 표정이 구겨져 운다. 김수박의 만화를 봐서 그럴까. 보고 싶다. 억억 그러면서. 그리고 보고 싶지 않다. 남은 국물 걸죽한 새벽에 우리가 기억을 공유했던 공간들에 이름을 적고 왔다. 파일롯뜨 유성 매직 펜. 우리의 정류장. 우리의 벽. 그걸로 충분해. 나 성시경 싫은데 '안녕 나의 사랑'만 계속 듣고 있네? 쓰러져 잠들었다가 해뜨면 출근하는 거지. 안 그래? 나는 내일 이사한다. 내가 잘 할게, 라는 말을 들으며. 나는 바다로 간다. 얼굴 붓겠다. 곡주라. 내일! 꿈! 증산역! 북가좌 전화국! 그렇게 하나씩. 나는 기억나지 않을 거야. 간사함. 얇음. 보일러 켜고 따뜻하게 잘 거야. 안녕, 안녕,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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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EEMS TO BE » Blog Archive » 지웅씨 글 분석 1 2008-11-01 00:23:08 #

    ... 라 시작하지? 내일 이사를 간다. 그래도 3년이라는 세월동안 정이 들었나보다. 등 붙이면 자던 사람이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있으니. 정도가 내가 할 수 있는 베스트한 글이다. 근데 지웅씨는 어찌 이런 멋지구리한 멘트로 글을 시작하는 거지? 누워 있다가 벽에 뺨이 닿았다. 잠이 오지 않아 길고 긴밤. 벽은 벽인데 오늘따라 벽 같지 않다. 만져보았다. 쓰다듬었다. ... more

덧글

  • JJuN@ 2008/10/30 00:30 # 답글

    이사 축하드려요;ㅅ;
  • GATO 2008/10/30 00:45 # 답글

    ㅊㅋㅊㅋ~
  • 아우라 2008/10/30 00:58 # 답글

    '안녕'이라고 하셔서 탈출하시나 했더니 다시 반지하로 가시는군요.
    그래도 이제 천정에 물이 새는 일 없겠지요. 이사 잘 하시길 바랍니다...^^
  • aera 2008/10/30 02:18 # 삭제 답글

    방이랑 대화를 나눌 수 있네요. 정이 많군요.
  • oldboy 2008/10/30 05:24 # 삭제 답글

    십 수 년 전 이야기지만, 마포에서 좌술교포 우쌈가족틈에서 쪽방생활 하던 기억이 나는군요.
    매일 술마시며 노래하고 떠들던 조선족들과 아빠는 엄마랑 싸우고, 엄마는 아들과 싸우며 매일 눈물 짜던 가족과,
    밤마다 판자벽을 긁어대던 쥐와 단칸방 문만 열면 벌렁 누워 자살한 큼지막한 바퀴벌레. 탐욕스런 주인 아줌마 얼굴.
    잠시지만, 집에서 잠들기 어려워 매일 밤을 비디오 방에서 잠들어야 했던 쪽방 시절의 추억의 스칩니다.

    이사 잘하세요.
  • gracin 2008/10/30 06:31 # 삭제 답글

    아, 은평구민이셨구나.. 이제 떠나시는군요.
  • hanos 2008/10/30 09:43 # 삭제 답글

    학창시절, 병역특례시절 반지하 2번, 지상층 2번을 이사 다녔는데
    유독 문제 많았던 - 곰팡이 피어오르고, 물 들어오던 - 그 반지하 방이 참 많이 생각납니다.
    요즘도 집을 구할 때면 창문의 갯수와 일조량, 빨래 말릴 공간에 엄청 집착한답니다.
    옷장 열 때 마다 곰팡이가 없다는 것에도 감사하고요.

    다시 반지하 방으로 가신다니, 부디 문제 없는 방이길 바라겠습니다.
    다음 기회엔 건강에 좋은 지상으로 올라오시길.
    서울 외곽 - 주로 버스 종점들이 있는 - 지역으로 오시면 집값이 좀 저렴하더군요.
    언제나 버스에 앉아서 출퇴근 할 수 있고, 이동시간이 길어서 PMP로 영화, 드라마 보기도 좋다는 장점이...
  • 토닥토닥 2008/10/30 10:34 # 답글

    이사 잘하시고, 번창하세요! (왠지 어울리지 않아요?)
  • 2008/10/30 11:17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cozet 2008/10/30 13:33 # 답글

    아.. 이 글 너무 좋으네요... 사람 냄새가 나요.. 이런거 좋아..그러니까 사람이지.. 이사 잘하세요.. ^^
  • misscrow 2008/10/30 17:10 # 삭제 답글

    이사............... 잘하구~ (우리동네로 오라니깐 그러네.. ㅋ)
    당신 사진 오래간만에 봤는데.. 살이 너무 빠졌어 =-=
    몸추스르고 살 다시 붙이라구~
  • monomane 2008/10/30 19:00 # 답글

    그르게요, 이사 잘 하시고 살 좀 찌세요 :)
  • ㅇㅎㅂ 2008/10/30 19:01 # 삭제 답글

    새로 이사한 곳에서도 멋지게 사세요
  • mooa 2008/10/31 08:52 # 삭제 답글

    이사 축하드려욧~~!!s(  ̄ ∇ ̄)∠)))
  • 날자 2008/10/31 19:12 # 삭제 답글

    이사한 곳에서 더 많은 추억을 만드시길 빌게요..

    저도 얼마전에 이사해서... 거의 10여년을 살던 집이다 보니.. 맘이 그렇더라구요. 아직 몇주 안되었는데..
    외출했다가 그 집으로 갈려고 몇번 그랬죠..(근처라서)
  • 소류 2008/11/01 01:29 # 삭제 답글

    앗 두정거장 차이..
  • 헤비스 2008/11/01 23:53 # 삭제 답글

    추억의 장소를 뜨셨군요. 새 보금자리에서는 좋은 일만 가득하세요.
    이사 축하(?)드려요.
  • 렌덮밥 2008/11/03 00:36 # 삭제 답글

    이사 축하드려요오~:)
  • 아동고 2010/01/17 01:08 # 삭제 답글

    반지하방에 살아보지 않은자와 이야기 하지말라,,,제 생각임돠.
    저도 은평구..
    남들이 잘 살다고 하지 않는 은평구에서도,,그나마, 반지하에 살아보았죠.
    특히 그나마, 공기가 소통되는 조그만, 창문으로 들어도는 윗집 주차시의 자가용차의 가스냄스는 못잊겠습니다.

  • الفلته 2012/07/20 04:46 # 삭제 답글


    이사 축하드려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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