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골리즘 선언

노골파 최규석에게 핀잔을 듣고 조금 늦게 쓰는 노골리즘 선언.

절반을 넘긴 2008년은 내게 있어 9.11과 같았다.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 연달아 터졌다. 예상할 수 없었다는 건 감당하기 힘들다는 말과도 같다. 대부분 신뢰에 관한 일이었다. 신뢰가 깨지는 순간 그와 관련된 세계 하나씩이 철저하게 파괴돼 무너졌다. 견디기 힘들었다. 나는 그 몇 개월 동안 죽으려고 두 번 해봤고 남이 내 앞에서 죽으려는 걸 한 번 이상 봤으며 이 모든 걸 이겨내려면 잔인해져야 한다며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사람을 세 번 이상 연기해봤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사람이 제 앞에 닥친 위기에 대처하는 방식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자기연민과 증오로 얼룩진 피해망상이다.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지만 역설적으로 빠지기 가장 쉬운 것이다. 우리가 함께 공유하고 나누었다고 착각하기 쉬운, 바로 그 추억이란 무섭게 감정적이고 기만적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세상이 원래 그렇다며 태연스레 지구의 원리를 내려다보는 가장된 원숙함이다. 요컨대 도사가 되는 것이다. 부조리까지 기꺼이 안아 감쌀 만큼 비겁할 수 있어야 한다. 아마도 이 세계에서 ‘어른스럽다’고 일컫는 태도에 가장 가까운 모습일 테다. 세 번째는 철저한 객관화의 태도다. 당신의 삶과 세계의 풍경, 더불어 그 자신마저 철저히 객관화시키는 것이다. 도사가 되는 것과는 다르다. 도사는 모든 걸 꿰뚫고 있다고 자부하기 때문에 되레 주관적이다. 이를테면 이렇다. 내 전부였던 그녀와 헤어졌어. 도사는 잘난 척 한다. 세상이 사람이 사랑이 원래 그래. 정직하게 객관화된 자는 그 처음과 끝의 아름다움과 더러움까지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아 그래서 그랬구나. 더불어 반성한다.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 번째는 어렵다. 세계의 균질하지 않은 풍경 앞에 지나치게 처연하거나 혹은 지나치게 오만한 순간, 덜컥 도사의 길에 들어서기 때문이다.

나는 그 가운데 첫 번째 방식에 길들여져 있었다. 누군가를 미친 듯이 사랑하거나 증오하지 않고선 도무지 견딜 수 없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세 번째 방식을 알고 받아들여 노력하면서 내 삶은 조금 나아졌다. 어찌해도 어찌할 수 없이 늘 되풀이되는 실수나 감정의 과잉을 거듭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뿌옇게 뭉뚱그려진 수사적 표현으로 나와 너와 세계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 게 아니라, 매우 적확하게 객관화된 구체적 언어들로 설명하고 끝내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부조리를 삶의 원리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빤한 잘못 그 자체로 인식하고 분노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물론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생각을 하자. 생각을 하자. 고민해야 한다. 조금 더 고민해야 한다. 늘 솔직해야 한다. 객관적으로 솔직해야 한다. 결국에는 행복해질 것이다. 이것이 나의 노골리즘이다. 노골리즘은 건강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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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ryingkid의 생각 2008/08/14 23:35 #

    '노골적임'에 대한 변명... more

  • poosuk의 생각 2008/08/15 16:59 #

    사람이 제 앞에 닥친 위기에 대처하는 방식에는 세 가지가 있다. - 노골리즘 선언, ozzyz review...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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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ozzyz review 허지웅의 블로그 : 노골리즘 선언 (2) 2008-08-17 01:12:33 #

    ... 성인을 연기하고 흉내 낼 이유 따윈 없다. 그저 나 자신과 솔직하게, 노골적으로 관계 맺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훨씬 좋아질 것이다. 그것은 결코 실패할리 없는 혁명이다. 노골리즘 선언 (1) ... more

덧글

  • 2008/08/12 16:50 #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
  • 음음 2008/08/12 17:05 # 삭제 답글

    그것도 지나갈 겁니다. 언젠가는...
    주제넘은 충고로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제 경우에는 그냥 말도 글도 생각도 줄이고 면벽수행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더군요. 그럴 때는.
  • 염신영 2008/08/12 17:08 # 답글

    가장된 원숙함과 어설픈 솔직함 사이에서 역시나 나의 고민과 사유는 끝에 가서 긍정적인 결론만을 내리려고 노력하는데, 원없이 살아주세요, 지웅기자.
  • 연필깎이 2008/08/12 17:45 # 답글

    어떻게 제 마음을 이렇게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거죠? 지극히 공감합니다. 블로그 구독하면서 계속 느꼈던 건데 언제쯤 책 한 권 써서 팔아주세요. 저는 허지웅님 책이라면 무조건 한 권 이상 살 겁니다. 지나치게 처연하거나 지나치게 오만하지 않게 저도 살고 싶어요.
  • 모과 2008/08/12 17:55 # 삭제 답글

    이제 입회비를 내시오. ㅎㅎㅎ
  • ozzyz 2008/08/13 00:42 #

    피라미드냐.
  • 연상호 2008/08/13 01:04 # 삭제

    입회비 나에게 냈음.
  • 탄이 2008/08/12 18:41 # 답글

    흠. 저도 노골리스트가 되어야겠군요!! 진로를 찾아주셔서 감사!
  • 그레이 2008/08/12 19:54 # 삭제 답글

    자신을 타자화시키는 게 가장 어려운 일이고 타자화시킨 자신을 객관화시키는 건 더더욱 어려운 일이고. 근데뭐 언젠가부터 그렇게 어려운걸 극복하고 감내하며 살기 싫어지더라고요.그깟 어려운거야 신에 가까운 사람들이나가능한거라고 저는 걍 되는대로 살기로.-_-ㅋㅋ그러고나니 고민도 별로 없어지고 마음은 편해지더군요.ㅋㅋ
  • 새벽 2008/08/12 20:01 # 삭제 답글

    힘내세요!
  • 구리 2008/08/12 23:29 # 삭제 답글

    으앙 ㅠㅠ 지웅신 너무 좋다
  • 카우프만 2008/08/13 00:12 # 삭제 답글

    힘내세요

    전 어리지만 벌써 2번째에요

    그냥 뭐 세상이 그런걸 어떻게하겠어요
  • ozzyz 2008/08/13 09:27 #

    세상이 원래 그런 게 아니니까 기운내시고요.

    도사가 되느니 차라리 괴물이 되세요.
  • 2008/08/13 00:54 #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
  • 이명 2008/08/13 08:15 # 삭제 답글

    숨이 찰때는 보폭을 줄입니다...
  • 2008/08/13 09:38 # 삭제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08/08/13 11:05 # 삭제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
  • 악어 2008/08/13 11:07 # 삭제 답글

    내장 깊숙한 곳까지 찔리는 기분이네요. 그러나 전 아직도 한 마리 개미새끼... 첫 번째에서 버둥거립니다. 노력해야겠군요. 노골리즘이든 뭐든 원없이 자유하세요~
  • 2008/08/13 12:02 # 삭제 답글

    도무지 상상할 수 없었던 2008년의 절반이 있었기에 노골리즘이 성취될 수 있었으라리는 생각이 듭니다. 그냥 취할 수 있는 삶의 포즈는 아닌 것 같아요. 지웅님이 앞으로 행복해질 수 있다니 다행..
  • sang 2008/08/13 15:55 # 삭제 답글

    제일 싫은 게 두번째.

    저도 노력할래요, 세번째..
  • 좌파논객 2008/08/13 22:51 # 답글

    잘 읽었습니다
  • Skyjet 2008/08/14 21:48 # 삭제 답글

    노골해지고 싶은데 누군가 덕분에 계속 도인이 되고 있음 아 어떡하나.
  • cryingkid 2008/08/14 23:34 # 삭제 답글

    전 첫번째로부터 벗어나고 싶어서 두번째쯤을 기반으로 삼고 세번째를 기웃거리는 놈이 되겠군요.
    한국의 리얼리즘이 촌스럽다고 하는 부류에게, 저는 그건 현실의 죄이지
    현실'ism'의 죄는 아닐 수도 있다고 늘상 얘기하는 편입니다.

    트랙백 해가겠습니다. :)
  • 은수기 2008/08/14 23:59 # 삭제 답글

    전 허지웅 님이 좋아요. 가식적인 사람을 싫어하고 솔직한 사람을 좋아하는 것도 저랑 비슷하고... 방송도 하시고 기자도 하시면서 쓰시는 글들을 보면 주류와는 다른 자기만의 색채가 있다는 것도 맘에 들고.. 또 기성질서에 순응하고 존중하는 사람들이 대다수 찌질이들인데 그것이 역겹다고 말하는 용기, 솔직함도 너무너무 좋아요.
    님 아래 쇠고기트레인 에서 얘기한 것처럼 세상에 솔직한 사람들은 정말 몇명 안되는거 같아요. 또 아래 글에도 얘기하셨는데 저도 님을 또한 다 아는 것처럼 얘기해서.. 그것도 죄송하네요. 암튼 제가 인터넷에서 유일하게 맘에 드는 분이예요. 뭐 실제는 어떠신지 모르겠지만 인터넷 상에서는 ㅋㅋ
  • 은수기 2008/08/15 00:09 # 삭제 답글

    음 자세히 읽어봤는데 객관화라... 세상도 인생도 참 부조리하죠? 전 제 인생의 부조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공무원이라는 직업을 관둘 거예요. 이번 주말에... 도사가 되느니 괴물이 되라.. 전 괴물이 진짜 아닌데.. 세상 사람 눈이나 이곳에서는 괴물 같네요. 암튼 명언이십니다. 굿~~~~~ 또 하나 배우고 가요~
  • 모카골드 2008/08/17 14:37 # 삭제 답글

    글 좋네요
    마지막 부분(생각을 하자. 생각을 하자)에선 극장전의 김상경 대사도 생각나고 :)
  • 무지개여신 2008/08/22 11:41 # 삭제 답글

    지웅님 담아갈게요, 고마워요.
  • 전단지박사 2008/11/10 20:32 # 삭제 답글

    잘 보고 갑니다 시간 되시면 제 카페도 들려 주세요 http://cafe.daum.net/ppp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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