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광장의 매트릭스

안전한 물대포의 안전하지 않은 물줄기가 등을 가격하는 순간, 나는 응암동 할인마트 3층에 여전할 그 검정색 안마의자의 300만 원짜리 성능을 추억했다. 툭툭툭. 푹푹푹. 손님 시연용 상품에 30분 이상 앉아계시면 곤란합니다. 지금 없이 산다고 무시하시는 겁니까? 네 그렇습니다. 네 그렇군요. 반면 물대포는 차별하지 않았다. 만인에게 축축하게 쏴아. 얼마든지 오랫동안 쏴아. 그러거나 말거나. 워쇼스키 형제라면 물대포의 습한 평등마저 실제의 차별을 유지하기 위한 가상의 형평으로 분석하고 말 것이다.

워쇼스키 형제의 영화는 늘 세계가 조작돼있음을 전제한다. 기계가 조작하고(<매트릭스>), 독재정부가 조작하고(<브이 포 벤데타>), 거대 스폰서 기업이 조작한다(<스피드 레이서>). 사람들은 조작된 세계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그 속에 안주한다. 뭔가 잘못돼있는 것 같기는 한데 그냥 그렇게 산다. 심지어 조작된 세계임을 알고 나서도 매트릭스 안에 남아 배불리 먹고 살 것을 선택하기도 한다. 그 쪽이 편하고 익숙하니까. 레이싱 세계가 돈에 의해 병들었다는 사실을 알고 경악하는 주인공에게 윽박지르는 사업가도 있다. 이 철부지 어린 것아, 그게 진짜 세상이야! 어른들의 세상이야!

현실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잖아. 그렇게 관성으로 억눌려 살아야 어른스러운 것이라고 교육받는다. 그게 진짜 세상이라는 걸 받아들이고 치기를 버리라 강요받는다. 비관과 자조, 패배주의 안에 무력하다. 아픈 사람이 병원비가 없어 죽었네? 세상이 원래 그래. 피부색이 다르다고 차별받아? 세상이 원래 그래. 엄마 왜 친일파 후손들은 다 잘 살아요? 세상이 원래 그래. 아빠 가진 집 아들들은 왜 군대 안 가요? 세상이 원래 그러하니 날 원망치 말거라. 가진 자들이 승부를 조작했다는군요? 세상이 원래 그렇다니깐 자꾸. 과연 어른들의 세상이란.

두 달을 훌쩍 넘긴 지금의 광장은 더 이상 쇠고기 프레임만으로 작동되고 있지 않다. 이명박 정부가 상징하는 온갖 천박한 가치들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겠다는 시민불복종-저항 운동으로 바라보는 게 적확하다. 워쇼스키 식으로 말하자면 광장 위의 촛불 하나하나가 ‘각성한’ 용자들이다.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에게 받아든 붉은 약을 꿀꺽 삼킨 네오와 같다. <브이 포 벤데타>에서 독재정권의 폭력을 몸으로 감당한 뒤 브이와 함께하는 이비와 같다. <스피드 레이서>에서 레이싱 세계의 추악한 진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순전한 재능과 믿음으로 끝내 승리를 거머쥐는 스피드의 박력과도 같은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우리 광장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자화자찬 떠들어 논할 건 없다. 용자에 어울리는 복장이 예비군복인지 하이힐인지 따질 이유도 없다. 다만 그에 앞선 자성이 필요하다. 이명박 정부에 속았다고 말한다. 정말 그런가. 속았어도 속은 게 아니다. 신자유주의 가치를 좇는 이명박 정부가 시민의 삶을 볼모로 특정 집단의 사익을 챙기는 건 스스로의 정체성에 충실한 것일 뿐이다. 경제만 살리면 그만이긴 뭐가 그만이야. 그보다는 우리가 무엇을 위해 누구와 싸우고 있는지에 대한 공공의 환기가 필요하다. 고시철폐와 이명박 개인에 대한 단죄가 전부가 아니다. 이 정부가 대변하는 모든 가치, 그리고 무엇보다 그 가치를 지지했던 나 자신과 싸워야 하는 것이다.

<브이 포 벤데타>에서 TV전파를 통해 모습을 드러낸 브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렇게 된 가장 큰 책임은 물론 국가가 지고 있습니다. 반드시 그 죄의 대가를 치르게 할 작정입니다. 그러나 사태가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된 가장 큰 원인은, 거기 앉아 TV를 보고 있는 여러분들이죠. 바로 여러분이 방임했기 때문입니다.“ 영화 말미, 사람들은 저마다 브이의 가면을 얼굴에 뒤집어쓰고 약속된 날 약속된 광장으로 나선다. 자성을 동력으로 무기력을 깨고 행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광장에 나서 힘을 갖고 세상을 바꾸길 열망한 것이다.

그때 그 흰 가면의 숱한 무리나 우리 광장의 촛불이나 오십보백보 다를 게 없다. 이미지고 상징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영화 속에서 의사당이 화염에 물들자 시민들은 그제야 가면을 벗고 얼굴을 찾는다. 그리고 가면을 허공 위로 집어 던진다. 촛불도 그처럼 언젠가 꺼질 것이다. 물 뿌리고 때려잡아 끌 수 있다는 어른스러운 착각은 버리는 게 좋다. 촛불을 든 사람들의 자성과 환기, 그리고 끈질긴 의지에 의해서, 그것은 스스로 꺼질 것이다. 허지웅 프리미어 기자 (<시사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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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테라의 생각 2008/07/04 15:13 #

    아픈 사람이 병원비가 없어 죽었네? 세상이 원래 그래. 피부색이 다르다고 차별받아? 세상이 원래 그래. 엄마 왜 친일파 후손들은 다 잘 살아요? 세상이 원래 그래. 아빠 가진 집 아들들은 왜 군대 안 가요? 세상이 원래 그러하니 날 원망치 말거라. -- 허지웅 ... more

  • 거리로 나선 시민들, 브이 포 벤데타 2008/07/05 11: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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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막가파 머슴과 피곤한 주인 2008/07/06 13: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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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mentirosa 2008/07/04 12:53 # 답글

    언젠가 소설을 쓰셔도 될거 같아요. 글이 점점 맛있어집니다.
  • 2008/07/04 13:01 #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08/07/04 13:06 #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
  • 똘이대마왕 2008/07/04 13:07 # 답글

    냠냠 쩝쩝.좀 달착지근 해졌는데요?
  • 삼겹살 2008/07/04 13:07 # 답글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 사랑이♡ 2008/07/04 13:11 # 삭제 답글

    촛불과 <브이 포 벤데타>가 이렇게 엮어 볼 수 있군요... 와우... 그래요 촛불은 윽박 지른다고 꺼지지 않을거예요...
  • 리드 2008/07/04 13:47 # 답글

    워쇼스키 감독의 메시지에 이끌려 빠가 된 사람으로서, 정말 와닿는 글입니다.
    이 친구들의 영화는 언제 보더라도 현실에 대한 저항의 소중함을 다시 일깨워 줘요.
  • 영경 2008/07/04 14:02 # 삭제 답글

    <브이 포 벤데타>를 보면서 이런 저런 생각들이 많이 들더라구요...
  • 질투가면 2008/07/04 14:10 # 답글

    좋은 글 우왕ㅋ굳ㅋ
  • 2008/07/04 14:17 #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
  • J H Lee 2008/07/04 14:17 # 삭제 답글

    브이 포 벤테타의 저 장면을 보고 소름이 끼쳤었습니다.


    뭐 다른 나라는 모르겠으나 우리 나라의 예를 볼 때 저런 영화스러운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을 보면 세상은 판타지..
  • 2008/07/04 14:27 #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
  • olive 2008/07/04 15:45 # 삭제 답글

    http://dvdprime.connect.kr/bbs/view.asp?major=ME&minor=E1&master_id=172&bbslist_id=1339751

    DP에서 브이포벤덴타 단체 퍼포먼스 한데유...간지 쩔듯 ^.~
  • .... 2008/07/04 17:30 # 삭제

    우왕 졸라멋짐ㅠㅠ
  • 자작나무 2008/07/08 13:39 # 삭제

    http://blog.sisain.co.kr/368
    사진.
  • 멋져요!! 2008/07/04 15:58 # 삭제 답글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 MCtheMad 2008/07/04 16:11 # 답글

    거 글 참 잘쓰십니다..
  • paper 2008/07/04 18:10 # 삭제 답글

    기자님이 영화매체에서 글을 계속 쓰셔야 하는 이유.. ^^
  • 나아가는자 2008/07/04 18:19 # 답글

    글을 먹고 사기가 올랐습니다.(+10)
    이제 서울광장으로 ㄱㄱ~
  • 에스테 2008/07/04 19:08 # 답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현 촛불 시위의 방향을 제대로 짚어주신 것 같아 속이 시원합니다.
  • 2008/07/04 20:58 #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08/07/04 21:20 #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
  • asdf 2008/07/04 23:09 # 삭제 답글

    기득권 횽아들이 보면 엄청 화낼만한 글.
  • 헤비스 2008/07/04 23:21 # 삭제 답글

    그래요..물 대포 따위에 꺼질 촛불이 아니지요.
    촛불광장의 글들은 맘을 울렁거리게 만들어요.
    역시 글쟁이라는...
  • ⓧ아셀 2008/07/05 01:22 # 답글

    이런 얘기 저도 한달 전부터 계속 생각하고 써왔는데, 허지웅님 글로 보니까 저는 역시 쪼렙이구나 싶네요 ㅠ.ㅠ
  • 스페이드A 2008/07/05 02:09 # 답글

    난 그 흔한 메트릭스도 않봤다는거..본거 딱 하나 "스피드레이서" 인데요..브이 어쩌구는 보고 싶네요
  • 좌파논객 2008/07/05 12:13 # 답글

    제가 제일 싫어하는 부사가 '원래'입니다...
  • 아르마lJJuN 2008/07/05 22:37 # 답글

    펜은 물대포보다 강하군요.
  • 나야꼴통 2008/07/06 00:08 # 답글

    모 영화동호회 에서 저 가면 공구 했다고 합니다.
    오늘 아니.. 어제 저 가면이 등장 했구요

  • 신토방 2008/07/06 13:24 # 삭제 답글

    당시 훌빈한 개봉관서 혼자 들기 아깝기도 하믄서 그게 편안하기도 하여 눈가늘게 뜨구 흠흠 냠냠 포식을 한 V였어랏! 초반 가면 아래로 속사포같이 흘러내리던 스피치의 매혹이 결코 용두사미가 아닌 이유있는 벽에서 용출된 것임을 입증해내던 후반의 장관. 이를 우리이웃들과 나누려 하고 있을 줄야..& 그리고?
  • 알렉스 2008/07/06 13:38 # 답글

    지인의 소개로 왔다가 명문들 잘보고 갑니다. http://blog.daum.net/alexkeum
  • 내부고발자 2008/07/07 03:52 # 삭제 답글

    얼마전부터 브이...를 곱씹어 보고 있는 1인.
    워쇼스키 형제가 명박산성을 먼저 봤다면 영화의 내용이 달라졌을지도.
    마스크 증정 행사할 때 DVD를 사둘 것을... 후회됩니다.
  • 2008/07/07 13:47 #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
  • 소류 2008/07/08 01:26 # 삭제 답글

    아이고 좋아라
  • 저기요 2008/07/09 02:57 # 삭제 답글

    슬픈 일이지만 자성은 없을거 같네요. 촛불 집회는 위대하지만 촛불집회가 세상의 전부는 아니니까요. 아무리 어른들을 설득하고 친구들을 부여잡고 이명박 개새끼 신자유주의 좆까라 마이싱, 신분 배반 이씨발. 설명해봤자 잠시 잠깐 "이명박이 잘 못하고 있는건 맞나부네" 정도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 뒤, 다시금 뉴스를 틀어 촛불 집회에 나선 또다른 '보통사람(이라고 쓰고 폭도로 주로 읽대요)' 들에게 쌍욕을 하는 '보통사람'이 아직은 이땅에 더 많습니다.

    애초부터 그런 자성 반성은 없었습니다. 왜 이명박을 뽑았니. "형 그때는 잘 몰랐어요" 그들은 고민하지 않습니다. "이명박 개새끼 씨발놈" 하면서도 동탄에 자기 이름으로 아버지가 사둔 땅 값이 오르면 얼마나 좋을까 따위의 소리를 지껄이는게 이 땅의 이른바 '보통 사람들'입니다. 슬프고 절망적이게도요.
  • willowkiss 2008/07/09 16:22 # 답글

    세상이 원래 그래............
  • 2008/07/10 10:13 # 삭제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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