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세 번째 <스피드 레이서>관련 글. 청탁 원고지만 어쨌든 영화에 대한 입장을 최종적으로 정리했다. <스피드 레이서>에 관해선 이게 마지막이라는 생각)
최고의 편곡. 하루 종일 무한반복으로 듣고 있음
<스피드 레이서>는 보기에 유치하다. 대단히 단순한 구성과 전개를 보여준다. 간혹 참을 수 없어 손발이 오그라들 만큼 유아적인 유머를 구사하기도 한다. 하나의 장면 위로 다른 시공간의 서사와 인물이 종횡무진 겹쳐 들어와 도무지 당황스럽다. 레이싱 경주 장면은 리얼리즘을 최대한 배제해 흡사 게임 장면처럼 보인다. 심지어 그 모든 광경이 무모할 정도로 빠르게 진행돼 종종 성의 없어 보일 정도다.
이 같은 영화의 유별난 개성은 원작 애니메이션의 감수성을 최대한 복원하고자 노력한 창작자의 의도에서 비롯된다. 실사영화에 비해 애니메이션은 확실히 ‘현실적일 것’이라는 화면 위의 강박으로부터 자유롭기 마련이다. 그런 매체의 성격을 간파하고 이를 자유롭게 활용할 줄 아는 작가들은 종종 뛰어난 걸작을 만들어냈다. 이를테면 곤 사토시의 <퍼펙트 블루>는 가장 현실적인 작화와 탄탄한 드라마 안에서 ‘애니메이션이기에 가능한’ 형식상의 파격을 감행함으로서 보기 드문 텍스트의 지위를 거머쥐었다.
거꾸로 실사영화 안에서 애니메이션의 형식을 실험한 <스피드 레이서>는,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에 미치지 못한다. 형식적 파격을 스크린 위에 옮겨오는 데는 성공했지만, 반대로 우리가 영화를 볼 때 기대할만한 서사의 안정감과 눈높이를 채우는 데는 모자랐기 때문이다. 물론 일반적인 시각에 비추어 볼 때 그렇다는 이야기다. 이 영화는 애초 창작자가 복원하고 자했던 애니메이션의 감수성을 살려내는 데는 무난한 성과를 거두고 있는 듯 보인다. 너그러운 관객들에게는 그 자체로 꽤 볼만하며, 이 영화만의 고유한 스타일로 인식되기에 이른다.

예의 그 ‘고유함’의 맥락에서 바라보면, 연기의 어색함과 CG의 완성도 따윈 <아이언맨>류의 영화와 기계적으로 비교되기 적합하지 않다. <스피드 레이서>를 이루고 있는 모든 요소는 ‘애니메이션에 최대한 가깝게’라는 목적에 충실한 것이다. 당연히 <스피드 레이서>의 CG역시 ‘현실보다 더 현실처럼’이라는 CG기술의 일반적 쓰임새와는 차별된다. 연기도 마찬가지다. 수잔 서랜든부터 비에 이르는 모든 배우들은 애니메이션 속 캐릭터의 향수를 복원해내는데 주력할 뿐 땅에 발이 닿은 연기를 하지 않고, 또 그럴 이유도 없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 모든 게 대중의 눈높이에선 과한 마니아 취향이다. <스피드 레이서>는 개성이 드문 영화로 남을망정, 누구나 환호할만한 여름 블록버스터 상업영화로 기록되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실패한 실험 혹은 값비싼 향수의 성긴 복원으로 치부하기에 <스피드 레이서>의 매력이 자꾸 눈에 밟힌다. <스피드 레이서>의 레이싱 시퀀스는 기존 레이싱 영화와 달리 손에 땀을 쥐고 볼만한 것이 못 된다. 애니메이션의 분위기를 재현하고자 하는 창작자의 의지 아래 거의 만화처럼 처리된 레일과 자동차들은 긴장감을 주기에 애초 힘이 달린다. 하지만 레이싱 도중 쏟아지듯 화면을 채우는 차체들의 역동성은 보기 드문 쾌감에 닿아있다. 당신은 로봇으로 변신한 자동차의 격투에 마저 익숙하겠지만 이건 경우가 조금 다르다. 심지어 버스터 키튼이나 성룡의 아크로바틱한 움직임에 닮아있을 만큼, 그것의 박력과 재미란 유별난 것이다.
<스피드 레이서>의 가장 유력한 미덕은, 그것이 얕다는 점이다. 맥락을 짚어 다시 바꿔 말하면, <스피드 레이서>는 얕아서 깊은 영화다. 워쇼스키 형제가 <스피드 레이서>를 통해 발언하고자 하는 것은 <매트릭스>나 (워쇼스키들이 제작하고 각본을 쓴)<브이 포 벤데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창작자들은 기본적으로 언제나 이 세계가 조작돼 있다고 전제한다. 대중이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는 가운데, 선택받은 1인이 세계의 본질을 깨닫고 이에 대항하게 된다는 구조를 되풀이 한다. 여기에는 예언을 하는 조력자가 필요하고(모피어스, 오라클 - 브이 - 레이서 X) 자각을 돕는 선택의 관문이 존재하며(빨갛고 푸른 알약 - 브이와 에비의 만남 - 로얄튼의 스카우트 제의) 시스템의 규칙이 파괴되는 구원의 순간이 준비돼있다. 이 모든 과정이, <매트릭스>에선 관념론에 빠져 허우적대다 지나치게 포괄적이고 신화적으로 구현됐다. <브이 포 벤데타>는 연출자의 부족한 역량이 그것을 효과적으로 형상화하기보다 단선적인 선동의 이미지에 그치게 했다.
<스피드 레이서>는 이를 매우 쉽고 간명하게 그려낸다. 총천연색의 활기를 그대로 옮겨오고자 했던 의도 안에서 워쇼스키 세계의 익숙한 내러티브가 보다 직접적으로 되풀이되는 것이다. 구악을 깨고 새 세계를 시작하려는 <스피드 레이서>의 고민이 너무 쉽고 편하다고 손가락질 하는 건 그 자체로 너무 쉽고 편한 지적이다. 사실 우리가 영화 안에서 어떤 고민을 느끼고 사고할 때, 그 영화나 창작자가 이를 미리 의도하는 경우는 대단히 드물다. 그와는 별개로 영화의 주제에 대해 관객이 평소 품고 있던 생각의 무게감, 꼭 그 만큼의 울림과 고민이 영화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다. 영화는 애초 세상을 담을 수 없다. 다만, 그것을 해석할 순 있다.

이 같은 생각의 줄기에서 조명해볼 때 <스피드 레이서>의 울림은 자꾸만 우리 주위 현실을 조명하게 만든다. 거리로 쏟아져 나온 10대와 20대들의 촛불이 스피드 레이서의 마지막 경주 장면 위에 수시로 날아와 겹쳐진다. 주인공은 돈이 승부를 조작하고 결정하는 레이싱 세계의 그 모든 부조리를 처연하게 받아들여 ‘진짜 레이서’가 되라는 로열튼 회장의 권유를 단호히 뿌리친다. 이는 마치 현실의 또렷한 잘못을 무심히 흘리거나 원래 세상이 그렇다는 식으로 방관하지 않고 순전한 분노를 빌어 광장 위에 선 젊은이들의 열정을 환기시킨다. 이를 치기어리다고 욕하는 입은 극중 로열튼 회장의 그것마냥 대체로 한심하다.
그래서 <스피드 레이서>의 마지막은 벅찰 수밖에 없다. 어른스러움이라는 이름의 패배의식 아래 조작된 세계를 뚫고 나가, 끝내 선두에 다가가고 있는 주인공의 의지란 숭고하다는 수사로 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속에서 주인공의 승리는 곧 세계의 재구성을 의미한다. 이미지의 파격과 호흡의 쾌감과 드라마의 진정성이 관객의 심장을 움켜쥐고 치솟는 경기의 절정은 흡사 새로운 우주의 탄생을 은유하는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의 결말을 연상시킨다. 영화 속의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새로운 세상이 시작됐어.” 대리만족 때문인지 결핍 때문인지, 나는 벅차올라 눈을 질끈 감았다. 허지웅 프리미어 기자 (<나라 경제> 6월호)




덧글
도발나라 2008/05/16 12:25 # 답글
개인적으로는 말그대로 너무 유치해서 재미나게 본 영화였습니다. 애니메이션 캐릭터 대신 사람이 나온 것 이외에는 다른 차이가 없어 보였습니다. ^_^환자 2008/05/16 12:53 # 답글
영화 스피드 레이서에 대해 저와는 좀 다르지만 어느 정도 일맥상통하는 견해에 많은 공감을 느낍니다. 어떤 분들은 스피드 레이서는 단순한 일본 애니메이션의 미국식 영화화일 뿐이기에 그렇게 대단하게 볼 것 까지는 없다고 하기도 하던데... 그런 글들을 보면 소쉬르가 생각나고 좀 많이 답답하더군요.환자 2008/05/16 13:11 # 답글
좀 늦었지만 링크신고합니다^^ 그런데 ozzyz님은 박민규씨의 소설을 읽어보셨는지요? 그의 문체가 떠오르는 유쾌한 문장들이 눈에 띄어 여쭈어봅니다.Jayhawk 2008/05/16 14:51 # 삭제 답글
비유컨대, 저는 극중 로열튼 회장의 그것마냥 대체로 한심한 쪽의 인간이군요. 부디...페라리의 기술을 훔친 맥라렌이나 스피드레이서의 마하6를 외면하지 않는, "세상이 그렇다는 식으로 방관하지 않고 순전한 분노를 빌어 광장 위에 선 젊은이들"을 바랍니다. - 때묻은 소시민.. 2008/05/16 18:37 # 삭제 답글
20분내로 다른 곳에 1번만 올리면 사랑하는 사람이 사귀자고 연락옴건전유성 2008/05/16 18:47 # 답글
최고의 편곡이라는 데에 한 표 추가.마무리 2008/05/16 21:49 # 답글
이번엔 안 우시는듯...암튼 재밌었쎄요
RADEON 2008/05/16 22:33 # 삭제 답글
이영화까는살암들이많나보군.'ㅅ'고고고 2008/05/17 01:06 # 삭제 답글
이렇게 재미있는 영화에 왜 의견이 갈리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됨.django 2008/05/17 01:06 # 삭제 답글
글만 읽고 가기엔 죄송스러워서...좋은 글 감사히 잘 읽고 갑니다 ^^
박군 2008/05/17 02:52 # 답글
하지만 분명히 다른것은, 분명 이시대는 80년대의 향수를 공유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는게 무리일뿐,그것이 틀렸다고는 말할수는 없겠죠...
오늘 보고 왔습니다만, 분명히 좋기는 좋은 애니메이션(?!)
Blue 2008/05/17 10:55 # 삭제 답글
이 글은 읽기 편해 좋군요.막똥이 2008/05/20 13:00 # 삭제 답글
SBS 모 영화프로에 나오셔서 스피드레이서 추천하시는거 봤다는....첨으로 오지즈 님 목소리 들었어요...생각보다 차분한 목소리였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