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영화제 심야상영 프로그램 '불면의 밤']
전주행 버스에 탔다. 우등해서 조금 더 비싸다는 버스였다. 학교 내내 열등생이었던 게 혹시나 탄로 나진 않을까 내심 조마해 똑똑해 보이려고 안경을 썼다. 뿔테라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의외로 고속을 실감할 수 없는 빠르기였지만 어쨌든 고속버스터미널을 빠져나왔다. 서울을 벗어난 뒤 창 밖의 풍경은 대개 논과 밭이었다. 이를테면 논-논-논-밭-논-밭-밭 이런 식이었다. 볕은 눈부셨고 그것이 닿는 곳곳은 순전하고 단순하게 푸르렀다.
가끔 눈에 띠는 농부의 얼굴은 찡그린 건지 눈이 부신지 그리 밝지 않았다. 나는 요새 땅에 빌붙은 농부가 무섭다. 대통령이 그랬다. “소 키우는 분들은 소수니까 보상하면 된다. 질 좋은 고기를 들여와 일반 시민들이 값싸고 좋은 고기를 먹게 되는 것”이라고 그랬다. 대통령의 문장에서 ‘소 키우는 분들’과 ’일반 시민‘은 서로 다른 계통 아래 별개로 떨어져 존재했다. 그래서 나는 일반적이지 못하다는 시민 아닌 소수의 그 분들이 무섭다. 일반적인 건 좋은 것이라고 배워왔기 때문이다. 다수인 게 민주적인 것이라고 배워왔기 때문이다. 일반이 아니라면 아마도 이반일까. 하지만 문득 의문이다. 서울을 벗어나 줄 곧 논논밭밭인데 대통령이 말한 ’일반 시민‘의 범위가 너무 협소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일반‘이라는 단어의 의미와 쓰임이 통틀어 흔들리지 않는가. 신문을 보니 대통령은 오늘도 맞춤법을 틀렸다. 어쩌면 ’일반‘이라는 단어의 오용도 오사카 출신이라 국어에 서툴러서일지 모른다. 대통령이 조금 더 실용적으로 똑똑했으면 좋겠다. 나는 높은 사람이 하는 말이라면 곧이곧대로 믿기 때문이다. 생각이 이어지니 더 이상 이반 농부가 두렵지는 않았다. 대신 일반 시민이 무서워졌다. 이 광우병적 고민이 전주에 체류하는 내내 어떤 식으로 이어지게 될지, 천진한 나로선 그때까지만 해도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애초 우등했던 약속에 따르면 전주까지는 두 시간 십 분이 걸려야 마땅했다. 하지만 도로가 막혔다. 세 시간을 꼬박 채우고도 몇 분을 더 달려 겨우 전주 시내에 들어갔다. 터미널의 내부는 첨단이 아니어도 깨끗하고 소박하게 단단해 보였다. 어느 한 쪽에는 이 땅에 계절가전산업의 역사가 시작된 것과 동시에 전격 출시됐음직한 몰골의 에어컨이 무심하게 툴툴대며 돌아가고 있었다. 그래도 바람은 시원했다. 동행한 형에게 이 에어컨이 무심한 듯 쉬크하다고 농을 걸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음 날 서울로 돌아갈 티켓을 미리 예약했다. 역시나 다소 외모가 쇠락한 ATM 기계를 이용해 발권했는데, 생소해 버벅거리고 주뼛거리다 형에게 혼이 났다.
이미 어둑해진 터미널 밖으로 나왔다. 형이 먼저 도착해 체류 중인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밥은 어디서 먹어야 할지 총체적이고도 근본적인 의문과 마주했기 때문이다. 지난 전주영화제들에서 선배 차에 얻어 타 자면서 왔다가 술만 마시고 자면서 떠났던 나로선 도무지 아련한 것이라 마음이 아팠다. 특히 먹을 것의 문제가 나와 형 사이에 FTA 재협상 논의마냥 뜨겁고 중요하게 대두됐다. 무려 전주에 와서 대충 아무데서나 끼니를 때운다는 건 참혹한 노릇이다. 또한 위험한 발상이다. 일단 배가 몹시 고프다는 동물적 진심 앞에 문득 길 너머 김밥천국을 물끄러미 바라보고야 말았던 것이다. 덕분에 동행인과 사이 의가 상할 뻔 했다.
형의 통화가 끝났다. “왜 지방에만 오면 사람들이 그 곳 토박이인 것처럼 행동하는 거지?” 형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짜증스레 투덜거렸다. 구체적인 설명도 없이 비빔밥은 역시 아무개 회관이 최고지, 식의 아는 척만 잔뜩 얻어들은 모양이다. 나는 그것을 ‘토박이 병’이라 부르기로 했다. 일단 택시를 탔다. 영화의 거리 쪽으로 향했다. 영화의 거리 초입의 작은 광장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거리 곳곳은 온통 루미나리에인지 루미나에르인지 루미나리떼인지 루미아무튼으로 대낮처럼 환했다. 길을 걷다가 다른 매체에 있는 친구를 만났다. 반가워 이름을 불렀다. 세워놓고 비슷한 걸 물었다. “우리 밥 먹으러 갈 건데 어디 뭐가 맛있어?” “음, 그러니까 그게” 아뿔싸. 그녀 역시 토박이 병에 걸려있었다. 나와 형은 황급히 자리를 떴다. 그리고 현지 사람이 가장 많은 듯 보이는 고기집에 들어가 놀랍게도 전국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대패 삼겹살을 먹었다. 나는 연신 맛있다며 미각을 가장했다. 그 자리에 정의란 대체로 드문 것이었다.
불면
‘불면의 밤’이 상영되는 전북대학교 삼성문화회관에 당도했다. 학교 정문을 지나 한참을 들어가야 했다. 중간에 작은 분수대가 나왔는데 삼삼오오 짝을 이뤄 술판이 벌어져있었다. 바닥에 깐 신문지가 정겨웠다. 한 무리의 남자들에게 다가갔다. “문화회관이 어디쯤인가요?” 대답이 돌아왔다. “잘 모르겠는데요.” 왜 그것이 “잘 모르겠는디요” 혹은 “잘 모르겠당께”가 아니었는지에 대한 지역감정적 의구심이 고개를 들기 전에, 전북은 전남보다 사투리가 강하지 않다는 한국지리적 진심에 가 닿기 전에, 남자는 잔디밭에 노란 국물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순간적으로 흡사 우주를 유영하는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그 초현실의 무중력 안에서, 나는 문득 외로워졌다.
문화회관은 벌써 숱한 인파로 가득했다. 아무개 감독이 눈에 띠어 악수를 나눴다. 그는 오늘 상영작들이 무척 재미없고, 그러니까 나와 클럽이나 가자는 감언이설을 동원해 몇 명의 여성 관객에게 추파를 던지는 중이었다. 귀여운 용모의 내게는 클럽에 가자고 제의하지 않아 또다시 문득 외로워졌지만, 어쨌든 그는 선량한 사람이다. 최소한 그의 전작들은 그랬다.
스크린이 생각보다 컸다. 사람들이 재잘거리는 소리는 그보다 컸다. 관객이 많이 든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었지만 실제로 보니 놀라웠다. 심야상영에 관객이 이만큼 몰리는 건 지난 1997년 1회 부천영화제 <킹덤> 심야상영 이후로 처음 보는 것이었다. 불이 꺼지자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나는 대개 이런 분위기를 잘 참아내지 못하지만, 오늘 만큼은 꽤 흥겹고 기뻤다.

첫 번째 영화는 요번 전주영화제 최고의 화제작 가운데 하나인 <시체들의 일기>였다. 조지 A. 로메로의 신작이다.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시체들의 새벽> <시체들의 낮> <시체들의 대지>이후 통산 다섯 번째 좀비 연작인데, 같은 소재와 주제를 가지고 비슷한 제목으로 수십 년간 꾸준히 달려드는 모양새가 <노인과 바다>의 노인 같아 애틋하다. 로메로 감독은 사실상 처음으로 스크린 안에 좀비라는 괴물을 끌어들인 장본인이다. 물론 그 전에 벨라 루고시가 나오는 <화이트 좀비>나 자크 투르뇌의 <나는 좀비와 함께 걸었다>같은 영화가 있었지만, 지금과 같이 ‘집단화된 괴물’의 모습으로 정착된 건 로메로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이 최초다. 감독을 향한 마니아들의 애정이 각별할 수밖에 없다. 그의 좀비영화는 여타 아류들과 차별되는 지점이 있다. 로메로의 좀비는 인간의 잔악성을 강조해내기 위한 일종의 장치에 불과하다. 또한 로메로의 좀비는 요즘 유행마냥 결코 뛰지 않는다. 그에게 좀비들이 사람보다 더 빨리 달리는 최근의 유행은 대단히 불만스러운 것이다. <시체들의 일기>가 시작하자마자 “시체가 어떻게 빨리 뛸 수가 있어, 그들은 몸이 굳어있다고” 식의 대사가 튀어나와 살짝 웃었다. 중간에 경찰 간부로 깜짝 출연하는 로메로 할아버지가 귀여워 또 한 번 웃었다.
그러나 영화는 전반적으로 불만스러웠다. <시체들의 일기>는 단편 영화를 촬영 중이던 대학생들이, 좀비가 발생해 인류 최후의 순간이 도래한 그 날을 카메라로 기록한다는 내용이다. 이를테면 <블레어위치 프로젝트>와 <클로버필드>의 좀비 버전이다. 꽤 흥미로운 발상임에도 불구하고 여러모로 부족했다. 일단 다큐멘터리의 외피를 선택하면서 로메로의 장점인 스토리텔링의 미덕이 상당 부분 망실됐다. 또한 기록 필름으로서의 미덕을 강조할 수 있는 부분에선 반대로 현실감각을 충분히 살리지 못해 안타까웠다. 시종일관 진중하게 상황의 내연을 설명해내려는 나레이션이 너무 많은 것도 단점이다. 그래도 몇 가지 신체 훼손 시퀀스는 꽤 볼만했다. 전기 충격기로 좀비의 눈을 녹여버리는 장면은 <매니악>시절 톰 사비니의 박력이 느껴져 즐거웠다. 다른 관객들도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그러고 보니 톰 사비니가 <시체들의 일기>에 참여하지 않은 게 의아하다. 어쩌면 로메로와 다퉜는지도 모르겠다. 누구나 머리가 좀 크면 스승과 싸우기 마련이다.
다음 영화가 시작되기 전 막간을 이용해 간식이 지급됐다. 전주영화제 홍보대사인 김성은과 김재욱이 직접 바나나와 우유를 나눠줬다. 나는 로비에서 입구 쪽을 바라보며 담배를 태웠다. 파도처럼 쏟아져 나온 사람들 전부가 노란 바나나를 입에 물어 힘차게 깨물어 대고 있었다. 왠지 소름끼쳐 오금이 저려왔다. 형에게 “저거 깨물지 말고 빨아 먹었으면 좋겠다”고 농을 던졌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왠지 창피해졌다. 야한 발상이 아니라 좀비 영화를 봐서 그렇다고 부연하려다 그만뒀다. 날이 찼다.
다시 불면
윌리엄 프레드킨의 <버그>가 이어졌다. 이미 재작년에 칸영화제에서 상영된 작품이라 익숙했다. <엑소시스트>의 프레드킨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버그>는 놀라운 영화다. 노장답지 않은 시선의 신선도와 찰기 덕이다. 영화는 외롭게 사는 여자와 어느 날 그녀를 찾아온 남자 사이의 비극을 다룬다. 우연히 동거까지 이르게 된 그들에겐 문제가 있다. 남자에게, 누가 보더라도 빤한 과대망상 증세가 있는 것이다. 정부에서 이라크 참전 군인들에게 일종의 실험을 행했고, 그 결과로 자신의 몸에 벌레들이 주입돼 있다는 내용이다. 여자는 남자를 믿을 수밖에 없다. 사랑하기 때문이다. 주체하기 힘든 그들의 체온은 결국 여자마저 과대망상의 비극 속으로 빨려 들어가 파국으로 치닫게 만든다.

원숙할뿐더러 광기와 고독을 고루 표현해낸 애슐리 쥬드는 얼핏 <몬스터>의 샤를리즈 테론을 연상케 한다, 고 옆 자리의 형이 말했다. 나는 그의 문어체에 놀랐고, 파브르적 관찰력에 다시 놀랐다. <버그> 속 애슐리 쥬드의 연기는 과연 명불허전이다. 쥐어짜는 듯한 표정과 발성의 절박함은 영화의 황폐함을 더욱 강조한다. 문제는 <버그>가 심야상영에 어울리는 작품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주로 하품, 때때로 야유가 이어졌다. 연극적 상황(본래 연극을 영화화했다)과 대사 위주의 진행, 공포영화로 보기에 다소 미흡한 몇 가지 설정이 관객들을 따분하게 만든 모양이다. 그래도 개인적으로는 <버그>가 제일 좋았다.
세 번째 상영작 <오두막>은 전형적인 스플래터 팝콘 무비였다. 가장 많은 웃음과 환호가 쏟아졌다. ‘골룸’으로 더 익숙한 앤디 서키스의 연기도 볼만했고 살과 뼈가 분리돼 피가 솟구치고 척추가 흘러내리는 신체절단의 살풍경은 꽤 흥겨웠다. 상상을 초월하게 과도한 스크린 속의 폭력은 본래 우습다. 샘 레이미나 피터 잭슨은 그걸 잘 알고 있었고, 90년대 이후 공포영화의 유력한 한 축을 형성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스플래터 호러영화들이 그렇듯 <오두막> 역시 <이블데드2>나 <데드 얼라이브>의 자장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다소 심심하지 않았나 싶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 날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건 <오두막>이었다. 환호로 얼룩진 공공의 경험 안에서 우리 모두는 드물게 충만했다.
아침이 밝았다. 나는 다른 매체의 기자와 형과 함께 감자탕에 소주를 마셨다. 서울의 여느 감자탕과 달리 국물의 맛이 풍요로웠다. 혹은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그리고 사우나에 갔다. 수면실은 더럽고 좁았다. 심지어 살을 맞대고 누운 아저씨도 몇 명 보였다. 샤워만 간신히 하고 뛰쳐나왔다. 결국 버스 안에서 자기로 하고 먼저 예매한 표를 교환해 서울행 버스에 올랐다.
또 다시 논논밭밭의 풍경을 만났다. 나는 잠결에 일반 시민과 이반 농부를 다시 떠올렸다. 조지 A. 로메로가 애초 좀비를 영화 속에 동원하게 된 계기는 소수의 일반과 다수의 이반을 은유하기 위해서였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인간은 정상이다. 괴물은 비정상이다. 좀비의 역사 전까지, 대부분의 괴물은 드라큐라나 늑대인간처럼 독자적인 카리스마로 작동됐다. 요컨대 그들에게는 이름이 있었다. 좀비의 역사가 시작된 이후, 괴물은 군중이 됐다. 이름은 없다. 좀비 영화 속에선 그들이 다수다. 우리가 비정상이라고 일컫는 것들이 다수가 되고, 정상이라고 생각해온 것들이 소수가 되는 전복의 순간, 과연 어떤 것이 일반적이고 일반적이지 않은 게 되는 걸까. <나는 전설이다>에서 로버트 네빌이 전설이 될 수밖에 없는 까닭은 지구상에 전부가 다 뱀파이어고 인간이 네빌 혼자 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어쩌면 영화 속에서나 존재하는 순진한 이데올로기다. 적어도 한국에선 소수의 엘리트 계층을 위해 다수의 서민 계층이 자발적인 봉사와 착취를 감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수의 전자가 일반이고 다수의 후자가 이반이다. 이 땅 위에서, 그리고 대통령이 은연중에 흘린 말 속에서 소수의 ‘일반 시민’과 다수의 ‘서민’은 그렇게 구분된다. 나를 태운 버스는 역시나 우등한 것이었는데 요번에는 약속을 지켜 꼭 두 시간 십 여분 만에 서울에 도착했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대합실의 TV에선 온통 광우병 이야기뿐이었다. 허지웅 (08.05.03)
(<프리미어> 172호 '셀프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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