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릭을 보라

영화에 대한 글을 써서 밥 벌어 먹고 사는 입장에서(요즘 들어선 꼭 영화만도 아니지만), 직무유기의 감정을 느끼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런 저런 물리적 심리적 연유를 들어 언론시사를 못가고 일반시사를 못가고 심지어 개봉관마저 찾아가지 못해 좋은 영화를 소개할 기회를 놓쳐버리는 경우가 특히 그렇다. 원고 마감 중에 골이 하도 아파서 극장을 찾았다. 연휴라 그런지 사람이 없었다. 웬일인지 인연이 없어 줄 곧 보지 못했던 <브릭>을 봤다. 운이 좋았고, 또한 운이 나빴다. 이걸 왜 이제 봤지.

<브릭>은 어느 비범한 고등학생의 이야기다. 그는 살해당한 전 애인의 사정을 헤집어 사건을 해결해나간다. 그렇다고 범인은 이 안에 있어, 라고 말하는 꽁지머리 소년이나 온갖 장치와 힌트가 난무하며 아귀를 뚝딱 맞춰가는 정통 미스테리 수사물을 떠올리면 곤란하다. <브릭>은 고도의 두뇌게임을 요구하지 않는다. 명쾌한 반전이나 대담한 활극을 찾아볼 수도 없다. 하지만 매 장면 관객의 호흡을 두 세수 앞으로 내다보고 있을만큼 충분히 명민하다. 매력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역시 느와르다. 탐정과 조력자가 있고, 보스와 졸개와 마약과 피와 배신과 총질과 주먹다짐, 그리고 팜므파탈이 등장한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고등학생이다(혹은 26살이다). 얼핏 우습게 들리겠지만 그렇지가 않다. 특이한 외모가 완성도에 우선하는 후진 영화는 아니다. 확고한 세계관이 있을 뿐이다(그게 너무 단단해서 흡사 연작의 일부나 드라마, 혹은 어느 드라마의 극장판 에피소드처럼 보인다는 약점이 있긴 하다). 이들이 자기 세대의 질서에 충실히 순응하면서도(엄마 앞에선 우유를 마시며 복수를 논한다) 장르적 틀 안에서 정색하고 자기 롤을 다하는 모습은 유쾌하되 유치하지 않고 흥미롭되 치기어리지 않다.

하지만 <브릭>의 진짜 아름다움은 장르 컨벤션을 변형시킨 세계관에 있지 않다. 정말 유효한 건 뭐라 단순하게 혀끝으로 정의내리기 어려운 공기다. 그 정체가 해괴한데, 적당히 불친절하면서 차고 무겁고 창백하고 가끔 격정적이다. 소년 탐정의 한숨 위로 <트윈픽스>와 <블루벨벳>, <도니 다코>의 기시감이 자꾸 날아와 겹쳐진다. 로라 팔머의 죽음을 캐려 작심한 하드보일드 윌 헌팅 혹은 다소 우울한 천재소년두기 같다. 인물들의 움직임이 빨라질 때면 순간적으로 저패니메이션의 적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종합해보자면, <브릭>은 데이빗 린치의 세계에서 구스 반 산트의 주인공이 <카우보이 비밥>의 호흡으로 진실에 접근해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말장난인지 아닌지는 직접 보면 알거고. 특히 히스 레저를 연상시키는 조셉 고든-레빗(브랜든)을 주목해볼만 하다. 소년 탐정 브랜든 연작이 나오면 기꺼이 다 챙겨볼 의지 있음. 올 연휴 당신이 극장을 방문해 단 한 편의 영화를 봐야 한다면, <브릭>을 보시라. 이 영화의 차갑게 가라앉은 체온은 확실히 극장에서 봐야 맛이 찰지다.


트랙백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TrackbackURL : http://ozzyz.egloos.com/tb/3609909 [도움말]
  • 브릭 - 새롭게 부활한 하드보일드 탐정물 2008/02/08 14:56 #

    어린시절, 정통 추리물에 익숙해져 있던 필자로서는 지적인 능력이 아니라 비정한 성격와 폭력도 서슴치 않는 주인공들이 주류인 하드보일드에 적응하기가 매우 어려웠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취향도 변하는 것인지, 이젠 하드보일드라는 장르가 낯설지 않다. 오히려 사소한 정에 얽메이지 않고 묵묵히 사건을 처리하는 이러한 비정파 주인공들에게 더 매력을 느낀다. 하드보일드. 직역하면 '완숙된 계란'이란 뜻이지만 1930년을 전후하여 미국문학에 등장한 새...... more

핑백

덧글

  • 2008/02/07 23:55 #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
  • 키티진경 2008/02/08 00:12 # 삭제 답글

    감사~
  • winnie 2008/02/08 00:26 # 답글

    오오오오-_- 이거이거 볼 영화가 넘 많은데 이런 평을 남기시다뇨!!
  • 2008/02/08 00:28 #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
  • ozzyz 2008/02/08 00:34 # 답글

    어머나 세상에.
  • 2008/02/08 00:37 # 삭제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
  • 파인로 2008/02/08 00:42 # 답글

    ozzyz 님이 기간을 한정시켜서(연휴 ~ 올해) '극장을 방문해 단 한 편의 영화를 봐야 한다면'이라는 단서를 붙인 영화들이 몇 편 있었던 것 같은데, 전부 좋았던 기억이 나네요. 꼭 보겠습니다.
  • ozzyz 2008/02/08 01:02 # 답글

    비공개/ 국내에서 그렉 아라키 영화 보기 너무 힘들어요;; 결국 대안은 다운로드 뿐인건지. 꼭 볼게요.
  • 2008/02/08 06:15 #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
  • anjai 2008/02/08 09:15 # 답글

    미스테리어스 스킨은 몇년 전 세네프에서 상영했었어요. 운이 좋았죠~. 브릭은 암만 생각해도
    개봉 안될거 같아서 걍 dvd를 질러버렸는데 이런... -.- 그래도 좋은 영화니 다시 극장에서 보렵니다.
    조이가 여기서 연기를 참 잘했어요.
  • 채리스터 2008/02/08 09:57 # 답글

    전 이거 봤는데, 너무 진행이 지루하더군요;;
    주인공이 저렇게 날뛰고다니는 이유도 잘 모르겠고..
  • 돈쿄 2008/02/08 11:48 # 답글

    주인공의 안경이 인상에 많이 남네요...
    단순히 천재 탐정이나 뭐.. 이런 느낌 보다는...
    하드-보일드 타입의 탐정이랄까...
  • 정worry 2008/02/08 12:13 # 삭제 답글

    솔로몬 가족의 토미가 저렇게 되다니... 토미야 잘 컸구나~ 소리가 저절로 나와요.
  • 정훈군 2008/02/08 15:13 # 답글

    정말 보고 싶은데. 설날 때 못 나가니.
  • 2008/02/09 18:08 #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
  • 필그레이 2008/02/11 00:50 # 삭제 답글

    맞아요. 영화 전체를 감싸는 '공기'...그거예요.역시 딱 집어내시네요.저는 보고도 아 뭐지...그 뭐랄까 암튼 신선해..그러고 말았는데.ㅋㅋ
  • june 2008/02/11 13:57 # 답글

    오늘의 영화로 탕탕탕!
  • onecent 2008/02/20 11:18 # 삭제 답글

    "데이빗 린치의 세계에서 구스 반 산트의 주인공이 <카우보이 비밥>의 호흡으로 진실에 접근해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
    대공감입니다.
    저는 브랜든하고 스파이크하고 묘하게 겹쳐져서 재밌었습니다. 헤어스타일도 은근히 비슷하고. 그 말도 안되는 격투기 실력까지도.
덧글 입력 영역

와이드 위젯2


4개짜리 애드센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