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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창정은 관록의 배우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배우가 아니라 엔터테이너처럼 보인다.
한 포털사이트의 영화 DB를 찾아보면 배우 임창정에 대한 항목이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된다. “경기도 이천의 한 농가에서 태어나 이천 초등-이천 중-이천 고교 졸업, 졸업과 동시에 무작정 상경했다. (중략) 먹고 살기가 힘들어지자 중국집 배달부, 가스 배달부 등을 하면서 연기자의 꿈을 키워나갔다. (중략) 대성공을 거두었다.” 솔방울로 수류탄만 안 만들었지, 이 정도면 거의 수령 동무의 독립운동 시절을 환기시키는 프로파간다 홍보물 수준이다. 나이 서른 살에 통장잔고는 160 달러뿐, 포르노 배우를 병행하면서 서른두 번째 시나리오를 퇴짜 맞고 나서야 겨우 <록키>로 인생 대 역전에 성공한 실베스타 스탤론에 버금가는 신화적 성공이다. 놀라운 건 그들의 구구절절 눈물겨운 고난사에 거품이 없다는 거다. 그들은 실제로 지독하게 가난했고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 기간을 거쳤다. 그렇게 밑바닥을 치고 올라가 자기 존재이유를 증명한 거다. 사람들은 성공신화를 좋아한다. 성공은 성공이되 남들이 인정할 만큼 지독하게 고생했어야 한다. 이를테면 술자리에서 종종 벌어지는 고생 올림픽을 떠올려볼만 하다. 어렸을 때부터 맞고 살았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혼자 벌어 학교 다녔다, 새 엄마가 괴롭혔다, 너 장기 팔아봤냐, 뭐 이런 이야기들이 대충 오가는데 중요한 건 과거와 달리 지금은 무척 성공해있어야 한다는 거다. 그 간극이 크고 넓을수록 승자다. 그래야 따뜻한 시선이 쏟아진다. 사실 지금도 여전히 불쌍한 사람은 고생 올림픽 따위에 낄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그저 조용히 있다가 술값을 내지 않는 영광을 차지할 뿐이다. 임창정은 독박으로 술값을 다 내도 좋을 사람이었다. 그는 90년대 초반까지 단역을 전전하다가 우연히 알게 된 이병헌의 로드 매니저를 시작했다. 1995년 발표한 1집 앨범으로 가수의 길을 걷게 됐는데, 1997년 발표한 3집 <그때 또다시>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마침 개봉한 <비트>에서의 호연이 맞물려 임창정은 명실 공히 '실력으로 승부하는‘ 만능 엔터테이너가 됐다. 이후 10장이 넘는 앨범을 발표하기까지 총 10여개의 골든컵과 14개의 10대 가수상, 음반상을 고루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가스 배달하다가 챔피언이 됐다, 그야말로 코리안 드림이다. 문제는 배우 임창정이다. 그의 발라드는 듣는 이의 귀를 사로잡아 가슴을 공명시켰다. 하지만 그가 정말 승부를 걸고 싶은 곳은 무대 위가 아니라 스크린 위였다. 그는 열 번째 앨범 를 발표한 이후 가수 공식은퇴를 선언했다. 연기에 집중하고 싶어서라고 말했다. 음반 시장이 얼어붙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가수로써는 이미 모든 걸 다 이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가 이룬 성취는 과연 그럴만한 것이었다. 하지만 반쪽짜리 성취였다. 정지영 감독의 <남부군>으로 데뷔했으니 연기 인생 18년째다. 요즘 같아선 거의 원로배우 격이다. 그런데도 임창정의 연기는 예나 지금이나 거의 변함이 없다. 좋게 말해서 한결같고 나쁘게 말해서 발전이 없다. <비트>의 환규나 <자카르타>의 블루나 <1번가의 기적>의 필제나 <색즉시공 시즌2>의 은식이나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거다. 영화 속에서 임창정은 매순간 연기하고 있다. 숨 쉬는 것조차 연기로 보인다. 눈물을 흐느껴도 웃음을 자아내도 무심한 듯 흐트러져 있어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철저한 계산 위의 연기도 아니다. 그랬다면 그것이 연기라는 걸 눈치 챌 수 없었을 것이다. 불필요하게 과잉된 부분들이 캐릭터의 맥락을 매번 흐트러뜨린다. 임창정이 입을 열면, 동작을 하면 극의 리얼리티가 땅바닥에 떨어져 뒹군다. 눈물을 흘릴 때는 관객도 함께 울 것을 강요하고, 웃음을 터뜨릴 땐 관객도 함께 웃을 것을 강요하는 연기다. <위대한 유산>을 찍은 직후, 임창정은 이미지 변신에 대한 강박을 버리고 잘 할 수 있는 걸 계속 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이미 ‘변신하지 않겠다’는 또 다른 강박을 짊어진 것처럼 보인다. 가장 참기 힘든 건 임창정의 눈물이다. 우리는 종종 잔인한 상업영화들을 만난다. 단지 돈벌이만을 목적으로, 사람들의 처연한 사정이나 소수성을 한줌의 웃음과 짜게 식을 눈물을 위해 진열하는 영화들 말이다. 임창정은 이런 식의 영화들에 종종 출연해왔다. 그는 그 안에서 깡패, 바보, 가난뱅이, 백수, 장애인, 고시생 같은 사회 비주류를 주로 연기했다. 그가 이런 배역을 자주 맡게 되는 이유는 뻔하다. 캐스팅 담당자들이 임창정의 고난어린 과거사를 염두에 두기 때문이다. 여전히 많은 관객들이 임창정을 인간승리의 대표적인 상징처럼 기억한다. 임창정이 연기하는 캐릭터의 소수성은 배우 자신의 ‘국대급 코리안 드림’ 이미지와 만나면서 비로소 완성된다. 문제는 임창정 연기 특유의 과장된 전형성이 그 자신의 비주류 캐릭터를 극단적으로 타자화시킨다는 점이다. 임창정이 연기하는 영화 속의 가난하고 멍청한 사람들은 우리와 다른 종류의 사람이 되고, 그 사람들이 당하는 억압과 고난은 관객의 2시간짜리 눈물을 위해 진열되고 소비된다. <1번가의 기적>에서 철거민들을 위해 몸을 날리는 장면이나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에서 아내를 위해 구걸하는 장면들을 눈뜨고 보기 힘든 건 바로 그 때문이다. 이런 영화들을 보고 있자면 연민에 앞서서 불편함이 밀려온다. 이 순간 임창정이 동요시키는 눈물은 스스로의 소수성을 판매하는 행위로 비춰진다. 가난한 자를 연기하면 가난의 슬픔을 팔고, 몸이 아픈 자를 연기하면 몸뚱이의 슬픔을 파는 걸로 보였다. 그의 속내와는 관계없이 말이다. 그건 페이소스가 아니다. 현재 그런 소수성을 현실의 문제로 짊어지고 있는 사람들을 두 번 죽이는 행위다. 이런 영화만 고집하다보면 임창정의 연기는 어떤 누구의 마음도 움직일 수 없게 된다. 최근 개봉한 <스카우트>와 <색즉시공 시즌 2>는 둘 다 임창정 주연의 영화다. 이 두 영화는 향후 임창정이 보다 나은 연기자로 거듭나기 위해 어떤 무게중심을 갖춰야 할지 알려주는 좌표와 같다. 가수 임창정이 벌어놓은 자산을 연기의 영역에서 쌓고 싶다면, 망설임 없이 전자와 같은 영화를 택해야 한다. 흥행은 후자가 더 잘될지 모른다. 하지만 영화가 흥해도 망하는 배우가 있고, 영화가 망해도 흥하는 배우가 있다. 임창정은 수편의 영화에 출연해왔지만, 여전히 배우가 아니라 엔터테이너로 보인다. 영화로 승부하기 위해선 극을 이끄는 게 임창정이 아니라 드라마와 플롯이 돼야 한다. 슬픔은 슬픈 자가 스스로를 감출 때, 웃음은 웃긴 상황 속에 스스로를 맡길 때 폭발한다. 이것은 ‘연기해내야’ 하는 영역이 아니다. 극의 맥락 위에 서 있지 않은 웃음과 슬픔은 공허하다. 임창정은 그것을 깨달아야 한다. 허지웅 (GQ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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