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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니발 더 카니발, 렉터의 귀환
조디 포스터는 짧은 순간 자기 귀를 의심했다. 지금 앤소니 홉킨스라는 이름의 저 영국 배우가 빈정거리는 모양새란 대본에 없는 내용일뿐더러 리허설 때도 하지 않았던 대사다. 그들은 볼티모어 주립 정신이상자 수용병원에서 클라리스 스탈링과 한니발 렉터가 처음으로 만나는 <양들의 침묵>의 도입부를 촬영 중이었다. “값비싼 가방에 싸구려 구두라, 때 빼고 광냈지만 품위가 없군. 영양 상태는 좋아 보이지만 저소득층 백인 쓰레기 집안의 자식일 테고, 웨스트버지니아 억양이 자기도 모르게 묻어나고 있어.” 여기가 문제다. 웨스트버지니아 운운하며 조디 포스터의 남부식 억양을 따라해 조롱하는 행동 따윈 전혀 미리 논의되거나 합의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이는 흡사 연기의 일부가 아니라, 조디 포스터를 향한 개인적 공격처럼 느껴졌다. 당황을 넘어 이젠 화가 치밀어 오른다. 탁 후지모토는 두 사람을 번갈아 찍는 대신 두 대의 카메라를 한꺼번에 작동시켜 배우들의 대화를 실시간으로 촬영하고 있었다. 기대했던 조나단 드미의 컷 소리가 들려오지 않자, 조디 포스터는 자신이 빨리 다음 대사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절망적이다. ‘문제는 저 망할 치가 내 억양을 따라하며 조소를 날렸을 때 머릿속이 이미 하얘져 버렸다는 거지.’ 침이 꼴깍 넘어가고 눈자위 밑으로 미세한 경련이 두어 차례 지나갔다. 앤소니 홉킨스의 치켜 뜬 두 눈이 그제야 시야에 온전히 들어왔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붉게 충혈된 잔인한 눈이다. 입가에 흩어진 미소가 그의 눈동자와 강렬하게 대비됐다. 그 안에 반사된 자신의 표정을 발견했을 때, 더 이상 그녀는 화를 내거나 당황하고 있지 않았다. 두려움에 질려 있었을 뿐이다. 앤소니 홉킨스의 예기치 못한 즉흥 연기는 다음 컷에서도 계속됐다. 그가 빠른 속도로 공기를 들이마시며 기괴한 소리를 냈을 즈음 조디 포스터는 공포에 눌려 숨조차 쉬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악몽같이 길고 긴 촬영을 모두 마치자마자 조디 포스터는 상기된 표정으로 앤소니 홉킨스와 조나단 드미에게 삼자대면을 요청하고 나섰다. “어쨌든 이런 식으론 연기를 제대로 할 수 없어요, 제가 무슨 말하는 건지 두 분 모두 아실 거예요.” 그녀는 조나단 드미가 애초 클라리스 스탈링 역으로 원했던 배우가 자신이 아니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미셸 파이퍼나 엠마 톰슨이 아니라 정말 미안하군.’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말들을 속으로 삭히며 조디 포스터는 이를 꽉 깨물었다. 앤소니 홉킨스에 대해 그녀가 아는 거라곤 영국의 연극무대를 주로 전전하며 훌륭한 커리어를 쌓았지만 미국에서의 스크린 나들이는 그리 주목할 만한 결과를 낳지 못했다는 사실 정도였다. <피고인>으로 이미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받은 바 있는 그녀는 자신보다 곱절이나 나이가 많은 이 영국 배우에게 좀 더 격에 맞는 대우를 요구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앤소니 홉킨스는 예의 그 사려 깊은 표정으로 정중히 사과했고 상황은 그렇게 일단락된 듯했다. 그녀가 모니터로 촬영 분량을 확인하기 전까지 말이다. 조디 포스터는 오늘 자신의 연기가 다른 때와 사뭇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거기에 클라리스 스탈링을 연기하는 조디 포스터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직 겁에 질려 간신히 말을 내뱉는 남부 출신의 FBI 연수생이 존재할 뿐이었다. 여태껏 자신이 연기해본 그 어떤 역할보다도 클라리스 스탈링이라는 인물이 잘 이해되기 시작했다. 혹시 앤소니 홉킨스는 이걸 모두 계산하고 있었던 걸까. 고개를 돌려 그의 표정을 살폈다. 조디 포스터와 앤소니 홉킨스의 눈이 마주쳤다. 한니발 렉터가 찡긋, 윙크를 날렸다. 영화역사상 가장 지적인 식인종 <양들의 침묵>은 히치콕의 <싸이코> 이후 가장 강렬한 인상의 스릴러영화였다. <싸이코>로 노먼 베이츠(앤소니 퍼킨스)라는 걸출한 캐릭터가 탄생됐듯, <양들의 침묵>은 한니발 렉터(앤소니 홉킨스)를 대중에 단단히 각인시켰다. 더불어, 매력적인 캐릭터에 함몰되기보다 탄탄한 스릴러 문법과 명민하게 배치된 영화적 효과를 통해 그 자체로 완성도 높은 작품이 됐다. 하지만 노먼 베이츠에 대한 대중과 평단의 감정이 단지 애증에 불과했던 반면, 한니발 렉터를 향한 지지는 일종의 팬덤 현상에 더 가까웠다. 그는 한 세기 전에 비슷한 인기를 누렸던 모리아티 교수(셜록 홈스의 숙적)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면 저렇지 않았을까, 싶은 캐릭터였다. 한니발 렉터는 지금까지 존재한 적 없는 유형의 악당이었던 것이다. 단지 또 다른 종류의 반영웅 캐릭터라는 말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그는 뛰어난 화가면서 심리학자이고 외과전문의며 사학자인 동시에 까다로운 입맛의 미식가이자 요리사였다. 다른 한편으론 피해자의 혀를 씹는 동안에도 심장박동수가 85를 넘기지 않는, 카니발리즘에 경도된 괴인이기도 했다. 선악을 구별하기 전에 이미 그런 판단기준을 훌쩍 초월해버린 듯한 ‘한니발 더 카니발’ 렉터 박사는 거부할 수 없는 치명적 매력을 내뿜었다. <양들의 침묵> 이전에도 한니발 렉터는 두 권의 소설과 한 편의 영화를 통해 이미 대중에게 소개돼 있었다. 하지만 사실 그건 별로 중요치 않았다. 모두가 사랑해마지 않는 건 ‘앤소니 홉킨스가 연기하는’ 한니발 렉터였던 것이다. 한니발 렉터는 저널리스트 출신 소설가인 토마스 해리스의 두 번째 장편소설 ‘레드 드래곤’(1981)을 통해 처음 그 모습을 드러냈다. 토마스 해리스는 연쇄살인사건을 해결하는 내용의 하드보일드 형사소설을 쓰려고 했지만 이야기가 잘 풀리지 않았고, 이에 ‘주인공에게 조언을 하는 또 다른 연쇄살인마’라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한니발 렉터는 그렇게 창조됐다. 그의 출발은 단지 서사를 위한 양념에 불과했고, 소설의 실질적인 주인공은 은퇴한 FBI 요원 윌 그레이엄이었다. 베스트셀러가 된 ‘레드 드래곤’은 수년 후 할리우드의 전설적인 제작자 디노 드 로렌티스와 마이클 만 감독에 의해 <맨헌터>(1986)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기에 이른다.(애초 데이비드 린치가 연출하기로 돼 있었으나 갑작스레 취소됐다) ‘레드 드래곤’이라는 제명을 그대로 사용하지 않은 건 ‘드래곤’이라는 단어 때문에 가라테영화처럼 보이지 않을까 하는 제작진의 걱정 탓이었다. 바로 직전에 개봉했던 마이클 치미노의 <이어 오브 드래곤> 역시 박스오피스에서 참패한 바 있었다. 마이클 만이 직접 각본을 쓴 <맨헌터>는 나름의 매력을 가진 좋은 작품이었지만 스릴러영화라기보다 액션물에 가까웠다. 브라이언 콕스가 연기하는 한니발 렉터는 상스러운 범죄자로 묘사됐고, 훗날 C.S.I를 이끌 윌리엄 페터슨은 윌 그레이엄이 아닌 더티 해리처럼 행동했으며, 원작의 주요한 모티브였던 달러하이드의 용 문신은 ‘너무 흉측하다’는 이유로 삭제됐다. 결말 역시 소설의 틀을 크게 흔들어 과격한 액션 시퀀스로 교체했고, 신시사이저 전자음악이 영화 전반에 걸쳐 입혀졌다. 토마스 해리스 소설을 영화화했다는 느낌보다는 마이클 만의 TV 시리즈물 <마이애미 바이스>의 한 에피소드처럼 보였던 것이다. 평론가들의 호평에도 불구하고 <맨헌터>는 흥행에 실패했다. 1989년, 디노 드 로렌티스는 한 통의 전화를 받게 된다. 오라이온 영화사의 부사장인 마이크 메다보이였다. “디노, 토마스 해리스의 신작 소설을 영화화하고 싶은데요. 그 작품의 판권이 당신에게 있다고 들었어요. 그걸 저희에게 넘기지 않으시겠어요?” 찰나의 정적, 굴지의 제작자 디노 드 로렌티스는 고민했다. 흥행을 의심하지 않았던 <맨헌터>의 실패는 아직 그에게 뼈아픈 상처로 남아 있던 터였다. 토마스 해리스와 개인적으로 무척 절친한 사이였지만 더 이상 그의 소설, 그것도 전편과 거의 비슷한 컨셉의 작품을 영화화하는 도박을 감행할 생각 따윈 없었다. 결국, 디노 드 로렌티스는 평생에 걸쳐 최악의 실수로 기억될 대답을 건네고 만다. “그럼 그렇게 하죠. ‘양들의 침묵’의 영화화 판권을 오라이온 영화사에 넘기겠어요.” 앤소니 홉킨스와 한니발 렉터 <양들의 침묵>은 애초 진 해크만이 연출을 맡고 그 자신이 한니발 렉터 혹은 잭 크로포드 역을 연기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61회 아카데미시상식에서 <미시시피 버닝>의 편집 영상을 보던 진 해크만이 “당분간 폭력적인 영화에는 참여하고 싶지 않다”며 마음을 바꿨고, 메가폰은 조나단 드미에게 넘어가게 된다. 조나단 드미는 클라리스 스탈링 역으로 <마피아의 아내>에서 손발을 맞췄던 미셸 파이퍼를 점찍고 있었지만, 그녀와 2차 후보였던 엠마 톰슨까지 “사람을 잡아먹는 야만적인 영화는 싫다”며 거절하는 바람에 고민에 빠졌다. 때마침 원작을 완벽에 가깝게 각색한 테드 탤리가 <피고인>의 조디 포스터를 강력히 추천했고, 그녀 역시 적극적으로 출연 의지를 보인 덕분에 스탈링의 캐스팅이 완료됐다. 문제는 한니발 렉터를 연기할 배우였다. 생김새 자체로 지적인 이미지를 풍기면서 야만적인 눈빛을 가진, 선악을 초월한 인물을 묘사할 수 있는 배우를 찾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조나단 드미는 한니발 렉터가 영화에서 차지하는 분량은 많지 않지만, 그의 존재감이 이 작품의 완성도를 좌우하리라 확신했다. 존 허트와 로버트 듀발, 잭 니콜슨, 로버트 드 니로가 차례로 거론되고 마지막에 앤소니 홉킨스라는 영국 배우가 물망에 올랐다. 셰익스피어 연극의 권위자로 이름 높았던 앤소니 홉킨스였지만 정작 미국 내에서는 지명도가 높지 않았던 터라 그의 캐스팅을 예측한 이는 많지 않았다. 하지만 조나단 드미는 그를 선택한다. 데이비드 린치의 <엘리펀트 맨>(1980) 때문이다. <엘리펀트 맨>에서 앤소니 홉킨스가 연기했던 프레데릭 박사의 선량한 이미지야말로 감독이 바라는 한니발 렉터의 표정이었던 것이다. 첫 번째 리허설 날, 앤소니 홉킨스가 그 스스로 트루먼 카포티와 캐서린 햅번의 억양을 조합해 고안했다는 음성으로 “안녕 클라리스? good evening, Clariss?"라며 입을 떼자 현장의 모든 사람들이 나자빠졌다. 조나단 드미의 선택은 옳았다. 소설 속에서 불가사의한 인물로 그려졌던 한니발 렉터가 앤소니 홉킨스의 표정과 음성을 통해 오페라적인 괴물로 재현되고 있었다. 1991년 개봉해 첫 주에 1,700만 달러를 벌어들이고 무려 5주 동안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한 <양들의 침묵>은 이듬해 열린 64회 아카데미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감독상, 남우주연상, 여우주연상, 각색상 등 주요 5개 부문을 휩쓸었다. <JFK>와 <델마와 루이스> <터미네이터 2> 같은 화제작들이 즐비한 해였다. 특히 앤소니 홉킨스는 118분 분량의 영화에 단지 16분 동안 스크린에 모습을 드러냈을 뿐인데도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는 행운을 누렸다. 하지만 아무도 그걸 ‘행운’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응당 당연히 받아야 할 상으로 생각했다. 이날 사회를 본 빌리 크리스탈이 입에 마스크를 하고 한니발 렉터 분장을 한 채 무대에 오를 정도였다.
당연히 속편 이야기가 안 나올 수 없었다. 조나단 드미와 앤소니 홉킨스, 조디 포스터는 어딜 가나 속편에 관한 질문을 받았다. 사람들은 한니발 렉터가 칠튼 박사를 뒤쫓아가 어떻게 박살냈는지 궁금해했고 스탈링과 렉터라는 기묘한 커플의 후일담에 대해서도 추측이 이어졌다. 오죽하면 동방의 작은 나라 한국에서 ‘속 양들의 침묵, 그후’라는 가상 속편 격의 소설이 나왔을까.(이 무허가 속편에서는 렉터의 진짜 이름이 공개된다. 한니발 ‘렉터스키’ 박사라고) 그 누구보다 속편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은 건 물론 토마스 해리스였다. 그는 “저작 활동에 영향을 받을까봐 <양들의 침묵>을 아직 보지 않았다”고 말할 정도로 영화와 소설의 관계에 대해 단절적인 태도를 보여 왔다. 하지만 정작 9년 만에 탈고된 ‘한니발’의 원고를 가장 먼저 받은 이는 출판사 관계자도 교열 담당자도 아닌, 조나단 드미와 앤소니 홉킨스, 조디 포스터, 그리고 디노 드 로렌티스였다. <한니발>과 <레드 드래곤> 디노 드 로렌티스는 <양들의 침묵>을 오라리온 영화사에 넘기는 치명적 실수를 범했지만, 그 속편만큼은 꼭 제 손으로 만들고 싶었다. 조나단 드미와 조디 포스터가 속편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히자 그는 실망하면서도 한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양들의 침묵>이 인질을 구하는 영웅의 이야기라는 서부극의 원형을 변용한 심리 스릴러였다면 <한니발>은 캐릭터 중심의 철저한 장르 오락물이 돼야 한다고 믿었다. 때마침 <글래디에이터>의 막바지 촬영 중이던 리들리 스콧은 디노 드 로렌티스가 자기 키만 한 원고(그는 상당한 단신이다)를 들고 콜로세움에 나타나 “<한니발>을 연출해볼 생각 없나?”라고 묻자 이렇게 답했다. “디노, 난 지금 로마 서사극을 찍고 있다고요. 곧바로 또 에픽영화를 만들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그는 카르타고의 영웅 한니발을 떠올린 것이다) 꼭 10년 만에 만들어진 속편이었다. 리들리 스콧이 연출하고 줄리안 무어가 새로운 스탈링을, 앤소니 홉킨스가 한니발 렉터를 다시 연기한 <한니발>은 주말 동안 5,800만 불의 수익을 올리면서 <양들의 침묵>의 세 배를 상회하는 흥행기록을 달성했다. <미션 임파서블> <쉰들러 리스트>로 유명한 스티븐 자일리언이 각본을 쓴 <한니발>은 렉터와 스탈링이 커플로 맺어지는 원작의 결말을 제외하면 소설의 이야기 틀을 거의 그대로 고수했다. 전반적으로 다소 응집력이 떨어지는 편집과 느슨한 전개를 이유로 대부분의 평론가들은 이 영화에 부정적인 반응을 내비쳤다. 하지만 디노 드 로렌티스는 겨우 평론가들의 말 몇 마디에 웃고 울지 않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곧바로 <레드 드래곤>의 제작에 착수한다. 이미 <맨헌터>로 한 번 영화화했던 ‘레드 드래곤’이지만 ‘분명 돈이 될 것’이라는 제작자의 믿음과 앤소니 홉킨스가 연기하는 한니발 렉터의 존재감이 영화의 탄생을 가능케 한 것이다. <양들의 침묵>의 각본을 써 오스카 최우수 각색상을 수상한 바 있는 테드 탤리가 다시 펜을 잡고 <맨헌터>보다 훨씬 원작에 근접한 이야기를 써내려갔다. 에드워드 노튼이 윌 그레이엄을 연기하고 랠프 파인즈가 ‘이빨 요정’ 달러하이드를 연기한 <레드 드래곤>은 <한니발>에 다소 못 미치는 흥행성적을 거뒀지만 평단의 좋은 반응을 얻었다. 윌리엄 브레이크의 ‘붉은 용과 해를 입은 여인’에서 따온 달러하이드의 용 문신도 훌륭히 재현됐고, 클라리스 스탈링의 등장을 암시하는 마지막 장면 역시 나쁘지 않았다. 사람들은 “좋은 영화가 나왔을 때 시리즈를 끝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한니발 렉터는 왜 사람을 먹게 됐을까 토마스 해리스의 신작 소설 ‘한니발 라이징’은 전작 ‘한니발’에서 거론됐던 렉터의 여동생 마샤에 대한 유년시절의 기억에서 출발한다. 일종의 프리퀄인 셈이다. 사람들은 ‘한니발’을 읽으며 “마샤를 잡아먹은 군인들”이라는 대목에 주목했다. 한니발 렉터는 마샤의 죽음에 관련한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해 괴로워했고, 클라리스 스탈링을 사랑하게 된 계기 역시 마샤의 존재를 대체하기 위해서였다. 결국 스탈링은 마샤의 위치를 대신하는 걸 넘어서 렉터의 진정한 파트너로 거듭난다. 스탈링이 렉터 덕분에 더 이상 꿈속에서 양들의 울음소리를 듣지 않게 됐듯, 렉터는 스탈링 덕분에 마샤의 꿈을 꾸지 않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궁금증은 여전히 남는다. 마샤의 죽음은 렉터에게 정확히 어떤 영향을 끼친 걸까. 소설의 집필과 동시에 각본이 쓰인 <한니발 라이징>(토마스 해리스가 각본을 쓴 최초의 렉터 시리즈다)은 한니발 렉터 같은 비상한 천재가 어떻게 사람을 먹게 됐는지, 그 출생과 성장의 비밀을 추적하고 나선다. 2차 세계대전 중. 리투아니아에 위치한 렉터 백작의 성이 독일군에 의해 포위당한다. 여덟 살 소년 한니발 렉터와 여동생 마샤는 군대를 피해 식구들과 함께 별장으로 몸을 은신한다. 소련군과 독일군의 전투 와중에 가족이 몰살당하고, 홀로 남아 있던 한니발과 마샤는 별장에 잠입한 독일군 부역자들에 의해 유린당한다. 결국 마샤는 그들에게 살해당해 먹히고, 한니발은 기억을 잃은 채 소련 치하의 고아원에 남겨진다. 세월이 흘러 장성한 한니발 렉터는 전도유망한 의학도다. 삼촌의 미망인인 레이디 무라사키와 사는 한니발은 그녀에게 사랑을 느끼고 있다. 마샤에 관련한 끔찍한 악몽에 시달리던 그는 독일군 부역자들이 마샤를 잡아먹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내고 복수에 나선다. 하지만 한니발은 복수의 끝자락에 이르러 피해가고 싶고,잊고 싶었던,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또 하나의 사라진 기억과 마주하게 된다. ‘한니발 더 카니발’은 그렇게 탄생된 것이다. 디노 드 로렌티스가 제작하고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의 피터 웨버가 연출은 맡은 <한니발 라이징>은 제목을 빼면 렉터 시리즈라는 사실을 잊을 만큼 전혀 다른 영화처럼 느껴진다. 앤소니 홉킨스 대신 프랑스 출신 배우 가스파드 울리엘이 젊은 시절의 한니발을 연기하고 있으며 잭 크로포드나 윌 그레이엄, 클라리스 스탈링 같은 익숙한 캐릭터들 역시 (당연히) 등장하지 않는다. 영화는 렉터가 나오는 근사한 스릴러를 원했던 관객이라면 다소 김이 빠질 만한 모양새다. 우리는 공포-스릴러 장르에서의 프리퀄 형식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볼 기회를 맞이한다. <양들의 침묵>의 한니발 렉터가 무서운 이유는 그의 존재나 행동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길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프리퀄은 그가 어디서 태어나 어떻게 자랐고 어떤 정신적 외상을 거쳐 살인을 저지르고 사람을 먹게 됐는지 설명하면서 한니발 렉터라는 캐릭터의 역사를 합리와 이성의 틀에 끼어 맞춘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건 이미 공포와 멀어진다. 토마스 해리스가 직접 쓴 각본 역시 원작과 많은 부분 궤를 달리하면서 다소 방만한 이야기 전개를 보여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니발 라이징>의 미덕은 너무나 분명하다. 이 영화는 렉터 캐릭터를 두려워하면서 또 한편으론 아끼고 사랑했던 대중들에게 어느 정도의 재미와 장르적 흥분을 제공한다. 설명될 수 없는 대상 위로 합리성이 겹쳐졌을 때 순간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는 전율과 오락성이 여기 있다. 마치 <나이트메어>의 살인마 캐릭터 프레디 크루거가 시리즈를 거치면서 출생의 비밀이 밝혀지는 것과 비슷한 종류의 쾌감인 것이다. 시대를 풍미했던 한니발 렉터를 떠나보내는 방식으로, 이 느슨한 프리퀄은 의외로 적합한 방식일지 모른다. <맨헌터>부터 <한니발 라이징>까지. 무려 5편의 영화적 여정을 통해 우리는 영화역사상 가장 지적인 식인종, 한니발 렉터를 만날 수 있었다. (토마스 해리스의 말을 인용하자면) 그에 대해 이렇게 많은 걸 알게 된 후에도 아직 살아 있다는 건, 정말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허지웅
[필름2.0 32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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