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의 경계에서 가족을 묻다
양영희 감독의 자전적 다큐멘터리 <디어 평양>은 이데올로기적 입장 차로 반목과 갈등을 거듭해온 부녀가 서로를 존중하고 타협점을 찾게 되는 일련의 과정을 추적한다. 가족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해 통일을 향한 뜨거운, 그러나 매우 근본적인 해답으로 귀결되는 이 다큐멘터리의 진정성을 들여다본다.

<피와 뼈>에서 기타노 다케시가 연기한 김준평을 기억하나. 재물과 섹스, 번식을 향한 욕망의 바다로부터 건져 올려져 폭력의 이름으로 거칠게 빚어 내린 듯한 인간, 오사카의 김준평. 자, 여기 김준평과 똑같은 출발점에 섰지만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한 사람을 소개한다. 김준평과 마찬가지로 제주도에서 태어났고 일본 오사카로 건너와 삶을 일군 재일교포 1세, 세 아들을 ‘귀국 정책’의 일환으로 모두 북한에 보내버린 조총련 오사카지부 부위원장, 일평생 한 여인만을 사랑했고 지금도 아내 없이는 숨조차 고르게 내뱉지 못하는 공처가, 자기 뜻대로 자라주지 않는 딸이 너무 미워 10년 넘게 대화하는 법을 지워버렸던 고집 센 아버지. 기억해주길 바란다, 그의 이름은 양공선이다. 그가 카메라를 사이에 두고 딸과 대화를 시작했다. 수줍은 듯 띄엄띄엄, 느릿느릿, 그러나 유쾌하게.
양영희 감독의 자전적 다큐멘터리 <디어 평양>은 대화를 통해 관계를 재구성하는 부녀의 이야기를 담는다. 영화는 평생을 정치적 언어와 행동 속에 살아온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는 딸이 서로의 이데올로기적 입장 차와 인생의 가치를 존중하고 타협점을 찾게 되는 일련의 과정을 소박하지만 진실 되게 그리고 있다. 이 치유의 여정은 물론 매우 개인적인 차원의 것이다. 하지만 <디어 평양>을 관통하는 정서의 기저엔 단순히 가정만능주의나 혈연지상주의로 설명될 수 없는 공적 영역의 깨달음이 함께한다. 아버지가 딸을 향해, 딸이 아버지를 향해 마음을 열고 그들의 인생을 이해하는 지점. 우리는 마술과도 같은 ‘작은 통일’의 순간을 맞이한다. 그리고 바로 그때, 한반도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입장에서 결코 가벼울 수 없는 울림이 파장을 일으키고 마침내 거대한 파고를 이뤄 눈시울을 뜨겁게, 입가를 단단하게, 가슴을 쿵쾅거리게 만든다. 딸과 아버지의 대화, 그리고 이들의 표정 위에 반목의 세월만큼 무수히 찍히는 방점들을 지켜보며 순간 이게 꿈은 아닐까, 하고 가슴을 쓸어 올리며 눈물을 쏟아내게 되는 것이다. 한 곡의 음악과도, 한 방울의 눈물과도, 한 구절의 잠언과도 같은 이 아름다운 다큐멘터리를 지켜보며 분단으로부터 비롯된 역사와 가족의 이야기를 떠올려 그 슬픔과 기쁨을 함께할 수 있는 우리는, 진정 행복한 관객이다.
내 인생 가장 커다란 질문, 아버지
<디어 평양>은 제목에서 언뜻 풍기는 뉘앙스와 달리 북한을 지지하거나 비판하려는 내용의 정치적 영화가 아니다. 명절을 맞아 집에 찾아온 딸을 반갑게 맞는 아버지의 표정으로부터 시작해 부모의 젊은 날과 북한의 오늘을 살아가는 오빠들의 모습을 담아내고, 병색이 짙은 눈길로 “그래 평양에 가자! 평양에 가자!”를 외치는 아버지의 목소리에 다다르기까지 이 다큐멘터리는 온전히 양영희 감독의 가족에 대한 사적 영역의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고로 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 역시 가족사에 관한 이야기로 열 수밖에 없다. 양영희 감독을 직접 만나 그녀의 아름다운 영화와, 그녀의 장난꾸러기 아버지에 대한 좀 더 사려 깊은 이야기를 들어봤다. 청자의 실루엣마냥 가는 선과 조심스런 인상, 시원스레 뻗은 콧날과 강직해 보이는 정수리. 아버지와 함께 영화의 또 다른 큰 축을 형성하면서, 정작 그 자신은 단 한 번도 직접 카메라에 비쳐진 적이 없는 내레이션의 주인공 양영희가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음에 틀림없는 특유의 쾌활함으로 방문객을 맞았다. 여보세요 양영희 씨, 이 기막힌 다큐멘터리의 시작은 도대체 어디로부터 연유된 것입니까.
일본에 거주하는 재일교포의 99퍼센트는 이남 출신이에요. 이들은 북조선을 지지하는 조총련과 대한민국을 지지하는 민단으로 갈라지죠. 분단 직후 남한의 정치경제상황은 매우 불안했고, 이에 비해 구소련의 영향권 아래서 경제적 성장을 한 북조선은 재일교포에게 무료 주택과 직업, 무상 의료 등의 정책을 내걸었습니다. 일본정부와 대중으로부터 숱한 억압과 핍박을 받고 있던 재일교포들은 당연히 북조선에 희망을 걸 수밖에 없었죠. 더군다나 많은 사람들이 제주 4.3사건으로 인해 남한정부에 뿌리 깊은 증오를 품고 있었구요. 돌이켜보면 우리 아버지들의 선택은 정치, 사상적 결단이라기보다 감정에 충실한 것이었던 것 같아요. 고향 잃고 관심 가져주는 이도 하나 없던 상황에서 김일성에게 반해버린 거죠. 1959년부터 20여 년 동안 ‘귀국 사업’이라는 기치 아래 9만 명 이상의 재일교포들이 북한으로 건너갔습니다. 이를 두고 일본언론은 ‘민족의 대이동’으로, 북조선은 ‘지상낙원으로 어서오라’며 미화하기 바빴어요. 이때 오사카 조총련 지부의 부위원장이었던 아버지는 이제 막 소년티를 벗기 시작했던 세 명의 오빠들을 모두 북한으로 보내는 모범을 보이게 됩니다. 하나 남은 자식인 전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자랐어요. 조총련 학교를 다니면서 주체사상을 비롯한 가르침들을 무리 없이 배웠죠. 재일교포 2세, 3세들에게 공히 나타나는 특징인데, 일본의 자유로운 문화와 학교에서 배운 정치적 교육 내용이 아주 사이좋게 머릿속에서 공존했습니다. 하지만 중학교 졸업 이후 장래를 생각하게 되면서 비로소 갈등이 시작되죠. 아버지와 주위 사람들은 모두 제게 조총련 계열 운동가로서의 삶을 강요했어요. 거기에 선택이란 있을 수 없었죠. 아니, 내 인생인데 왜 내게 선택권이 없다는 거지? 그때 처음으로 주체사상을 비롯한 북조선 이데올로기에 회의를 느꼈던 것 같습니다. 압력에 못 이겨 조총련 계열 학교의 교사 노릇을 잠깐 하다가, 결국 때려치우고 아르바이트로 웨이트리스 일을 하면서 늘 하고 싶었던 연극 일을 시작했어요. 집에선 난리가 났죠. 아버지와 거의 매일 다투게 되면서 결국 부녀 사이에 대화라는 게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20대 내내 10년 동안 그렇게 대화 없이 지냈어요. 심지어 겸상조차 하기 싫었습니다. 부모님은 2층, 저는 3층에서 잠을 자는데, 친구들은 2층과 3층 사이 계단을 “베를린 장벽”이라고 불렀어요. 사상의 이름으로 가족과 친구의 왕래를 가로막아버린 베를린 장벽.베.를.린.장.벽. 한 글자 한 글자를 되새김질하듯 똑똑히 발음하는 양영희의 입가에는 분명 웃음이 드리워져 있었지만, 눈가에선 감출 수 없는 쓸쓸함이 묻어나왔다. 돌이켜보면 모든 자식들은 아버지와 대립한다. 흔히 넘어서야 할 유일한 존재로 그려지고, 인식된다. 화해가 능사는 아니다. 영원히 반목하거나 서로를 인정하는 식으로, 소년과 소녀들은 그렇게 성장한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일거수일투족을 추적해 소소한 삶의 표정까지 기록하는 <디어 평양>은 어떻게 시작될 수 있었을까? “그건 한 가지 질문에서 시작된 겁니다, 내게 있어 가장 궁금하고, 가장 알고 싶고,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란 누굴까, 라는 질문 말입니다.”
아버지를 외면한 채 20대를 다 보내고 30대가 막 됐을 때, 논픽션에 대한 관심이 커지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그때부터 비디오카메라를 들고 아시아 각국을 누비며 NHK 등의 방송국에 공급되는 뉴스를 제작했습니다. 당시 저희 가족은 조총련의 가족방문을 기회로 북한을 종종 방문했는데, 비디오카메라를 가져가 오빠 가족을 찍었습니다. 단순히 홈비디오를 만들어보자는 생각에서요. 일 년에 한두 번씩은 꼭 방문했죠.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기자란 “당신은 왜 그렇게 했나요” 혹은 “왜 그렇게 하지 않았나요”라는 질문을 던지는 직업이고, 난 그런 질문을 하기 위해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고 있는데, 그럼 정말 내게 있어 가장 궁금하고 이해가 가지 않는 대상이란 무엇일까. 아하. 당연히, 당연히 아버지인 거예요. 왜 민단이 아닌 조총련을 선택했고, 왜 굳이 오빠들을 북한에 보내야했으며, 왜 그런 인생을 고집해 여기까지 왔는지. 제일 궁금한 대상이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던 겁니다. 그즈음 즐겨 찾던 야마가타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셀프 다큐멘터리나 가족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들을 보면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로 찍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흐릿한 생각을 하게 됐구요. 그렇게 10년 동안 아버지와 오빠 가족을 찍게 됐습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명확하게 딱 부러지는 목표가 있어 작업을 시작한 게 아니에요. 오빠에 관한 내용은 북조선 정권의 정책상 자칫 본인들에게 누가 될 수도 있는 일이었구요. 사실 그 부분이 가장 민감한 문제였죠. 흔히 <디어 평양>이 10년 동안 만들어진 영화라고 하는데, 이걸 영화화할 수 있을까, 없을까를 10년 동안 고민했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할 겁니다. 20대 내내 말도 걸지 않던 딸이 느닷없이 카메라를 들이대고 질문을 시작하니, 아버지는 적잖이 당황해하셨어요. “너 이게 무슨 지랄이야”하시며 화를 내셨죠. 그래서 처음 3년 동안 찍은 테이프에는 아버지가 등장하는 분량이 아예 없답니다. 물론 저라고 쉬운 일이었겠어요? 카메라라는 중간 매개체가 없었다면, 전 결코 아버지와 대화를 시작할 수 없었을 것 같아요.마술과도 같았던 그날, 그 하루
<디어 평양>은 2004년 정월초하루, 명절을 맞아 오랜만에 부모를 찾은 양영희의 시점으로부터 시작된다. 아버지는 유난히 기분이 좋다. 싱글벙글, 딸이 건네는 세뱃돈에 얼굴 가득 뿌듯하고 귀여운 감정을 감추지 않는다. 오로지 북조선 남자, 혹은 조총련 계열 남자하고만 결혼하라던 철통같은 원칙도 이날 갑자기 꺾어졌다.
-딸도 키워두니 세뱃돈도 받고 좋구나. 애인 하나 안 데려오는 것만 화가 나. -어떤 남자면 좋겠어요? -어떤 남자라도. -정말? 그럼 프랑스 남자라도? -그건 문제가 달라. -결국 주문이 많으신 거지. -어쨌든 조선 사람이라야 좋다. -어떤 조선 사람? -한국이든 (북)조선이든 좋아. -와, 한국도? 그럼 미국 국적을 가진 조선 사람은? -안 돼! 미국은 안 돼! -결국 주문이 많으신 거지. -네, 미안합니다. -그럼 미국 국적을 가진 한국 사람은? -(회피하며)차 주시오.
그런데 이 양반, 갑자기 정색하고 카메라를 바라본 채 관객을 향해, 우리들을 향해 이야기를 시작한다. 다큐멘터리의 객관적 시선이 일순간 무너지고, 아버지와 우리 사이에 커뮤니케이션이 일어나는 극적 순간이다.
여하튼. 내 딸이 이렇게 커서. 내 말을 듣던 안 듣던. 내가 생각하는 대로 갔던 안 갔던. 난 정말 기뻐요. 정말 기뻐요. 컸으니깐. (잠시 침묵) 컸어요.
호랑이의 마음을 가지고 있던 이 할아버지에게 무슨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진 걸까. 단지 세월의 무게가 그의 마음을 흔들어 헐겁게 풀어놓은 것일까. 영화의 말미에 이르러 카메라는 도입부로부터 다시 몇 달이 지난 2004년 6월의 어느 날을 비춘다. 그날 아버지는 양영희가 생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무덤덤하게 털어낸다. 그리고 딸 앞에서 데구르르 데구르르 재롱을 부리고 세상에서 가장 예쁘고 귀여운 표정을 지으며 행복해한다. 양영희가 <디어 평양>을 완성해야겠다고 마음먹게 만든 이날,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그러니까 그날, 아버지가 오빠들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어요. 우리 집에서 일종의 금기시됐던 이야기. “오빠들 3명 다 (북조선에) 보낸 거 후회하세요?”라는 제 질문에 “벌써 다 가버린 거 할 수 없지만, 만일 안 보냈다면 더 좋았을지 모르지”라고 하시는 거예요. 30년 가까이 조총련 부위원장을 지내시고 지금도 여전히 김일성, 김정일 부자를 철두철미하게 신봉하는 분입니다. 그런 말이 쉬울 리 없거든요. (북조선의 상황이) 이렇게까지 될 줄 몰랐고, 그래서 당시에는 오빠들을 북한으로 보내는 데 망설임이 없었고, 이보다 훨씬 일찍 많은 문제들이 해결될 줄로만 알고 있었다는 아버지의 진지한 대답이 너무나 고마웠습니다. 그날 저녁에는 더 굉장한 일이 있었어요. 우리 집 불문율 중 가장 절대적인 하나가 북한 국적을 유지해야 하는 겁니다. 하지만 외국에 자주 나가야 하는 저는 난민이 갖는 여권과 마찬가지인 재입국허가서가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에요. 예전에 남한 국적으로 바꾸면 안 되겠냐고 물었다가 집안이 발칵 뒤집힌 적이 있답니다. 그런데 이날 밤, 한국 국적으로 바꾸면 안 되겠냐며 은근슬쩍 뱉은 물음에 너무나 별 것 아니라는 듯 “그럼 바꾸면 되지” 하시는 거예요. 아버지와 어머니, 평양에 있는 오빠들은 “죽어도 절대로” 바꿀 수 없지만, 전 바꾸라는 겁니다. 놀라우면서도 은근히 왕따 당하는 기분이 들어 캐물었죠. 그랬더니 그러시는 거예요. 넌 특별하니까, 정세가 바뀌었으니까, 영희가 더 자기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없이 조금만 타협하는 거라고. 세상에. 그렇게, 그렇게 쉬웠던 거예요. 아버지와 제가 서로를 이해하고 타협하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이었던 거예요. 한 마디로, 단 한 마디로 쉽게, 그렇게 쉽게. 그날 결심했죠. 이제부터라도 아버지와 더 많은 대화를 나눠야겠다고. 꼭 그렇게 해야겠다고요.
하지만 아버지는 역시 장난꾸러기였다. 딸의 맘대로 따라주지 않는. 그날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노환으로 인한 급성발작으로 반신불수의 몸이 되고 말았다. 아버지들은, 어머니들은 야속하게도 자식들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일흔아홉의 아버지는 요즘도 매일 같이 어머니를 찾고,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 곁을 결코 떠나지 않는다고 한다. 간호사들에게 허구한 날 “우리 아내가 제일 예쁘고 좋아요. 사랑해요”라고 소리 지르는 덕에 그들 부부는 병원에서 아주 유명하단다. 얼마 전 어머니가 영희 씨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버지가 건강한 몸이셨다면, 오빠들을 북한에 보낸 귀국운동을 후회하는 내용과 정치적으로 다소 타협적인 당신의 모습이 그려진 이 영화가 전 세계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걸 마냥 좋아하지는 못하셨을 거라고. 그날 그 모습은 아마도 우리 부부가 네게 줄 수 있는, 영희야 이제 너의 영화를 한 번 만들어봐라, 하고 안겨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 아니었을까 싶다고.
우리는 다르지만 공존할 수 있다
<디어 평양>은 보편성을 가진 영화다. 가족을 다루기 때문이다. 베를린국제영화제 최우수아시아영화상, 선댄스국제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 싱가포르아시안페스티벌 최우수다큐멘터리감독상, 바르셀로나아시아영화제 최우수디지털시네마상 등의 화려한 공치사들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공감대를 형성하는 이 영화의 보편적 화두를 증명한다. 하지만 동시에 <디어 평양>은 특수성을 가진 영화다. 독일 관객들은 이 영화가 보여주는 가족적 가치 이외에도 분단의 경험에서 기인하는 역사적 특수성에 주목했다고 한다. 같은 맥락에서 바라보면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만큼 이 영화에 깊이 공감하고 흐느낄 수 있는 관객은 없다.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분단의 아픔과 그 여파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이 땅 위의 대중에게 이르러 비로소 온전히 독해될 수 있다는 의미다. <디어 평양>은 가족관계의 신뢰회복과 가부장제사회 속에서 독립된 여성자아로서의 주체성 찾기라는 이야기 속에 통일에 대한 뜨겁고도 간명한, 그리고 가장 근본적인 진심을 드러낸다. 그것은 서로 다른 삶의 가치관과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가진 사람들, 예컨대 남한과 북한이 상대를 이해하기까지 그렇게 크고 공고한 기회비용이 드는 게 절대 아니라는 진실이다. 마치 <디어 평양>의 고집 센 아비와 딸이 결국 너무나 쉽게 진심을 털어놓고 대화할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누르거나 집어 삼키지 않더라도 어떤 형태로든 서로를 이해하고 공존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깨달음이다. 통일이라는 말에 앞서 정치적 실리와 경제적 부담 같은 시스템적 난제들을 먼저 떠올리는 세상에 <디어 평양>이 들려주는 소박한 이야기. 언뜻 무책임해 보여도 실은 가장 진실 된. 그건 바로 나와 네가 다름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하는 이해와 공존, 그리고 사랑의 위대한 힘이다.
영화의 말미, 양영희는 짙은 병색으로 이제 입조차 자기 맘대로 가눌 수 없는 아버지에게 외친다. 조금 가치관이 달라도, 사상적으로 달라도, 아버지 어머니 딸로 태어나 행복하다고. 서로 너무나 사랑하는 아버지가 부럽고, 어머니가 부럽다고. 그러자 갑자기 아버지가 아기처럼 흐느껴 울기 시작한다. 왜 울어요. 좋은 일이잖아요. 아버지 파이팅! 같이 다시 평양에 가야죠. 또 한 번, 가족들이 기다리는 평양으로. 아버지가 나오는 울음을 집어 삼키며 안간힘을 다해 외친다. 파이팅! 가자! 평양 가자! 그들에게 있어 그것은 가족의 또 다른 이름, 나와 다른 네가 가족의 이름으로 어울려 공존할 수 있는 이상향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래서, 디어(Dear) 평양이다. 허지웅 (23일 서울 명동 씨네콰논 단관 개봉. 꼭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필름2.0 310호]




덧글
초하류 2006/11/24 02:16 # 답글
이 다큐 개봉을 하는건가요? 꼭 보고 싶네요ozzyz 2006/11/24 02:17 # 답글
초하류/ 서울 명동의 씨네콰논에서 어제부터 상영 시작했어요. 꼭 보셨으면 좋겠습니다.jomjs 2006/11/24 11:57 # 답글
<화씨9/11> 이후로 다큐멘터리 영화에 흥미를 느낀건 이번이 꼭 두번째군요.그런데 이 죽일놈의 정시때문에... 나중에 빌려서라도 꼭 봐야겠습니다.
툭툭 2006/11/24 14:32 # 답글
서울쪽만 하는건가요? 서울에서만 한다면,저는 광주에 살아서 못 볼것같네요.. 젠장..왕도비정도 2006/11/25 00:49 # 답글
근현대사시간에 박제화된 지식으로만 배웠던 통일, 그리고 아버지와 소통하는 법을 가슴으로 느끼게끔 해 줄 영화 같아 보여요. 2층 3층이 베를린장벽이었고, 그 베를린장벽이 무너지는 순간은 아주 가까이에 있다는 것. 감독이 자신이 직접 겪은 순간, 감동들을 전하고 싶어하는 진심이 그대로 묻어나네요. 저도 영화보고 나서 친구들에게 소개하겠습니다. 선추천 후감상.^^;2006/11/25 02:10 # 삭제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ozzyz 2006/11/25 06:41 # 답글
jomjs/ 꼭 보시길 바랍니다.툭툭/ 작은영화 배급현실이란게 이런거죠. 심지어 다큐멘터리다보니 지방 개봉은 엄두도 못내고 있나봐요. cj인디쪽으로 뚫었으면 좀 나았을런지.
왕도비정도/ 네, 꼭 보세요 ^^
비공개/ 자네도 보셈.
Hope 2006/11/27 19:32 # 삭제 답글
봤습니다만.. 전 결국 그렇고그런 가족씨네마라는 느낌 이상 들지 않았습니다.그것이 평양이 아니라 한나라당이나, 범죄조직이라도 마찬가지이지 않았을까요.
가족이야기에 정치적 레토릭을 어설프게 곁들인 이 영화가, 하필 '평양'이라는 이유로
추천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박치기나, 이 영화나 비슷하더군요. 제게는.
daewonyoon 2009/05/09 05:30 # 답글
KBS에서 하는 것 보고 이 글 읽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유쾌하고 명랑한 가족들이 인상적이었습니다.doccho 2009/07/03 18:11 # 삭제 답글
인권연대에서 <디어평양> '단관'을 합니다. 7월 6일 월요일 저녁. 한겨레 이재성 영화담당 기자께서 같이 하십니다. 자세한 내용은 링크 참조해 주시기 바랍니다.고맙습니다.
(홍보라기보다 '단관'에 의미를 두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