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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가는 모든 것들의 보고, 청계천 황학동이 그 생명력을 다해가고 있다. 과거, 전국에 유통되는 비디오가 한 번쯤 반드시 거쳐 가야했던 부가판권시장의 황금어장 황학동. 옛날 비디오를 찾아 그곳을 다시 찾았다.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겠다. 3년 만에 다시 찾은 청계천 황학동은, 더웠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아니면 순서를 바꿔 가을 겨울 봄 여름 언제 찾아가더라도 정수리와 겨드랑이, 발가락 사이로 어김없이 차오르던 찝찔한 땀내가 기억 너머에서 불쑥 떠올랐다. 이 정체불명의 더위에 대해선 TV프로에 출연해 청계천 복원사업이 서울 도심의 열섬현상을 없애줄 거라며 적외선 지도와 도표를 곁들어 설명하던 안경잡이 박사조차 끝내 설명해주지 못했다. 번번이 거리 위에 깔려 있던 차분한 먼지안개와 노란색 셀로판지를 덧대어놓은 것 같은 풍경까지 시야에 들어오자 내가 비로소 황학동에 돌아왔음을 실감했다. 언뜻 둘러본 3년 만의 황학동은, 상당히 정돈됐다고나 할까. 어떤 록 스타를 무척이나 닮았던 시장의 선도 아래 질서정연하게 가로 잡히고 세로 잡히고 칸을 나누고 줄을 그어 '개선'된 청계천의 도로 한 가운데를, 인간미를 찾아볼 수 없어 인조인간 로봇 마징가Z를 연상케 하는 12만 톤 검은색 물길이 관통하고 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이 마징가Z는 국민의 혈세로 운영되는 150마력짜리 모터펌프 4대가 없으면 주저앉는다 했다. 인생을 통틀어 이곳이 아니면 결코 다시 볼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진귀한 물건들. 그 물건들을 손수레 가득 싣고 행인을 유혹했던 노점상들의 행렬은 공룡처럼 이미 오래 전에 사라졌다. 당황스런 3년 만의 재회
문을 열자 지난 장마 동안 단 한 번도 환기를 시키지 않았음이 거의 확실시되는 짙은 곰팡내와 피사의 사탑 마냥 쌓여 있어 기침만 해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비디오테이프 무더기가 손님을 맞이했다. 내일 당장 홍수가 밀어닥치는데 방주에 시동 걸 열쇠를 잃어버린 노아의 눈빛을 한 사장이 나를 발견했다. 한때의 단골을 전혀 기억 못하는 눈초리다. 좀 섭섭한데. “황학동 비디오 시장에 대해 기사를 쓰고 있는데요, 잠깐 말씀 좀 나눠볼 수 있을까요?” 뭐야 이 자식, 하는 눈초리로. “망했어. 다 망했는데 무슨 얘기를 해. 그런 소리 할 거면 나가. 요 옆 가게도 있고 저 옆 건물 1층에도 있는데 왜 2층까지 기어 올라와 지랄이야. 심난해 죽겠는데.” 순간 얼어붙었다. 어마마, 티끌만치도 예상치 못했던 반응. 창피한 일이지만 눈물까지 찔끔 지려버리고 말았다. 도망치듯 매장을 빠져나와 거리 위에 우두커니 섰다. 이토록 격렬한 반응이라니. 어쩌면 <괴시>를 헐값에 산 것에 대한 때늦은 천벌인지도 몰라. 빨리 이 충격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하늘이라도 우러러보려고 고개를 들었더니,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를 말해준다'는 TV광고로 기억되는 주상복합단지의 반쯤 만들어진 마천루 그룹이 황학동 하늘 구석구석 빽빽이 들어차 있다. 한창 공사 중인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를 말해주는' 건물 한 가운데에는 사기분양이 공공연하게 이뤄지고 있다, 차후 적법한 분양공고가 있을 예정이니 기다려 달라는 내용의 대형 플래카드가 부초처럼 나부끼고 있었다. 난 언제쯤 이런 아파트에서 살아보나. 그러고 보면 죽네 사네 하면서도 아파트 한 채씩은 꼭 가지고 있단 말야. 판교 신도시 2차 분양 이후에는 용인이 뜬다는군. 은평 뉴타운이 민간 분양보다 평당 95만 원이 비싸다던데, 그럼 서민은 다 죽으란 말이냐, 야 다 나와, 뭐 이런 어른스런 생각을 거듭하다 마주오던 행인의 어깨에 밀려 겨우 정신을 차렸다. 대한민국 모든 비디오는 황학동을 거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게 있어 황학동 시장이라 하면 그건 그저 ‘비디오 시장’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도소매 시장을 형성하고 있는 황학동 비디오 시장은 한국 영상물 부가판권 상권의 알파요 오메가다. 대한민국에서 유통되는 모든 비디오는 그 삶이 계속되는 한 반드시 황학동을 한 번쯤 거쳐야했다. 날마다 새로 등장하는 신간 비디오들이 황학동에서 전국 비디오 대여점으로 뻗어나가고, 몰락한 대여점의 중고 비디오들이 황학동으로 돌아와 헐값에 다시 대여점과 개인 고객에게 팔려나간다. 바로 이 중고 비디오야말로 황학동의 묘미라고나 할까, 혈혈단신 서울에 똬리를 틀고 대학생활을 시작했던 1990년대 중후반, 나는 거의 일주일에 두세 번씩 중고 비디오를 찾아 황학동을 찾았다. 딱히 할 일도 없었거니와 내가 좋아하는 영화라는 것이 대부분 정상적인 비디오 대여점에선 찾아볼 수 없는 종류였기 때문이다. 그런 류의 시시껄렁한 영화들을 여의도 공원 비둘기만큼이나 발에 채이게 발견할 수 있는 황학동은 내게 있어 그야말로 잭 스패로우의 카리브 해였다. 고전 한국영화나 B급 공포영화, 고전 한국공포영화면 더 좋고, 그런 필살의 비디오들을 찾아 먹색 봉지에 쳐 넣고 집에 돌아가는 길이면 밥을 안 먹어도 배부르고 화장실에 가지 않아도 개운했으며 어떤 시리얼을 먹지 않아도 호랑이 힘이 솟아났다. 그런데 그 시리얼을 먹으면 성욕이 감퇴되고 정자 수가 준다는데, 진짜일까? 아무튼 그렇게 비디오를 사들고 오면 어김없이 피시통신에 접속해 “나 오늘 이런 저런 비디오 구했다, 부럽지?” 따위의 글을 올려놓고 저 혼자 좋아 킥킥대곤 했던 것이다. 가끔씩 나만큼 지독히 할 일 없는 인사가 답글을 달아 축하해주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그저 자기만족에 불과했다. 추억은 그만두고 일 해야지, 하는 맘에 발을 뗐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여전히 황학동 최고 규모를 자랑하는 비디오 상점 ‘비디오 여행’으로 향했다. 삼일 아파트 18동 2층에 자리한 가게다. “황학동 장사도 올해가 마지막인 셈이지”
유사 이래 황학동 시장을 지배해온 것은 돈, 시장논리였다. 거미줄 같은 골목길을 따라 전체를 관통하는 보이지 않는 질서다. 누구네 아들, 누구네 조카, 사돈 팔촌의 조카의 동서, 무슨 고등학교, 대학교 출신, 그리고 그 출신의 아들과 친구들이 주름잡는 한국 주류사회와는 달리 황학동만큼은 돈의 논리로 일어서고 쓰러지고 재기해왔다. 그랬던 황학동이 이젠 개발논리에 의해 고난을 겪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이제는 그 명맥조차 유지하기 힘들게 생겼다. 황학동 시장은 올해 말이나 내년 초까지 모조리 다 철거될 예정이다. “우리 머리 위로 주상복합건물 짓고 있잖아. 개천복원에 방해돼 노점상들 내보내고, 이젠 우리 차례인 거지. 아직 시에서 공식적으로 통보가 내려온 건 아닌데, 조합 쪽으로 해서 다 얘기가 전달됐어. 청계천에서 장사하는 것도 올해가 마지막인 셈이지 뭐.” 삶과 생존의 문제가 왔다갔다하는 와중에 옛날 비디오 찾는 미션 따위가 뭐가 그리 중요해, 라지만 결국 한쪽 구석에서 몇 개 테이프를 골라내고 말았다. <고무인간의 최후>와 <네온 익스프레스> <악마의 씨> 그리고 <마견>. 한국 비디오업계의 눈부신 작명 철학이 다시 한 번 빛을 발하는 대목인데, 피터 잭슨의 데뷔작 <배드 테이스트>를 <고무인간의 최후>로, 로만 폴란스키의 <로즈메리의 아기>를 <악마의 씨>로, 그리고 사무엘 풀러의 <화이트 독>을 <마견>으로 바꿔 대중성과 오락성을 고루 겸비한 제목을 창조해낸 것이다. 그게 무슨 궤변이냐 묻는다면 <화이트 독>을 곧이곧대로 <백구>라고 했을 때 얼마나 무미건조하고 긴장감이 떨어졌을지에 대해 논하고 싶다. <배드 테이스트>라고 하면 언뜻 감이 안 오지만 <고무인간의 최후>라 했을 때는 도대체 고무인간이라는 것이 어떻게 생겼을까 하는 매우 근원적이고 본능적인 충동으로 인해 비디오를 꺼내들지 않을 수 없지 않나. 피터 잭슨은 한국 비디오업계에 감사해야 한다. 싸구려 제목에도 불구하고 꽤나 잘 만든 좀비영화 <네온 익스프레스>는 <네온 매니악>(1996, 조셉 맨자인)의 제목을 좀 더 그럴싸하게 바꿔놓은 것인데, 미국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이 영화가 하물며 한국시장에 버젓이 출시돼 있다는 것은 이래저래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역시 한국 비디오 시장만이 가지고 있는 낭만이랄까. 이제는 모두 옛날 일이지만. 내 인생 마지막으로 보는 비디오들
한국 고전영화가 많기로 유명한 삼일 아파트 21동 1층의 ‘무비월드’를 찾았다. 한쪽 구석의 최신영화 DVD를 제외하면 매장 사 면과 가운데 선반 모두가 비디오로 가득 채워져 있는 가게다. 한국 고전영화를 찾는다면 황학동 무비월드나 을지로 쁘렝땅 백화점 지하 ‘청춘극장’을 찾는 것이 별 대단스럽지도 않은 상식이던 시절이 있었다. 임강우 사장님은 “손님이 거의 없지만, 그래도 고전 한국영화를 찾는 고객들이 꾸준히 찾아온다”며 과거의 명성이 지금도 여전히 통하는 상식임을 확인시켰다. 주로 40, 50대 마니아들이 주로 찾는 이곳도 과거만큼 많은 고전영화를 보유하고 있진 않다. 이젠 더 이상 한국 고전영화 비디오를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젠 더 이상 중고도 나오질 않다보니 여기 있는 비디오들이 다 팔리고 나면 그걸로 끝인 거야. 지금 보고 있는 그 비디오들이 기자선생 인생에 마지막으로 보는 것들일 수도 있어.” 이만희의 <쇠사슬을 끊어라>와 신상옥의 <여수 407호>, 장일호의 <성형미인>, 그리고 전조명의 <서산대사>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정형미인'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진 <성형미인>이나 박암의 대머리가 눈에 선한 <서산대사>의 비디오는 다른 데서도 몇 번 만난 적이 있는데, <쇠사슬을 끊어라> 같은 경우는 비디오가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던 작품이다. 황학동 시장이 한참 잘 나갔던 90년대까지만 해도 10만 원은 족히 받았을 이 비디오는 현재 4만 원에 팔리고 있었다. <일사-나치 친위대의 색녀> 류의 컨셉과 정통 탈옥영화의 장르적 특성, 그리고 한국적 신파 감성이 묘하게 버무려진 <여수 407호>는 곰털처럼 많은 신상옥의 영화들 가운데서도 나 같은 어둠의 아이들이 특별히 더 좋아했던 작품이다. 한쪽에서 왕지징의 <헬로강시>도 발견할 수 있었는데, 홍콩의 유관위 류의 강시영화보다 대만의 헬로강시 시리즈를 더 좋아했던 나로선 무척 반가운 일이었다. 우와! 라든가 이햐! 라든가 오호! 라든가, 뭐 이런 탄성들이 오가는 시끌벅적한 재회의 기쁨도 잠시, 이 비디오들이 전부 내 생애 마지막으로 만나는 모습일지 모른다 생각하니 슬퍼져버리고 말았다. 왜 지상 위에 모든 것들은 그 소중함을 미처 깨닫기 전에 한 발 먼저 사라져버리고 마는 걸까. 아 이 짓궂은 인생이란. 어리석은 인간이란. 사라져가는 모든 것들의 총체
다시 황학동 쪽으로 방향을 바꿔 삼일 아파트 맞은편에 있는 오래된 아파트 옥상으로 올라갔다. 시멘트 색이 그대로 드러난 구닥다리 아파트의 고르지 않은 계단을 올라가는 동안, <소름>에서 광태가 살던 미금 아파트가 떠올랐다. 그만큼 무시무시하지는 않았지만, 그만큼 초현실적이다. 옥상에 올라 황학동을 바라보니 저 멀리 종로의 빌딩숲에서부터 여기 황학동 상가를 양분 삼아 그 위로 뻗어 자란 듯한 주상복합빌딩 공사현장까지 한 눈에 다 들어왔다. 두말 할 나위 없이, 그건 현실이었다. 그제야 황학동에 올 때마다 느꼈던 사시사철 더위의 원인을 깨달았다. 사람 표정보다 더 빨리 그 모습을 바꾸는 서울, 그 서울의 한복판에서 사라져가는 모든 것들을 우직한 표정으로 잡아 쥐고 지켜온 삶의 힘. 난 그 위대한 힘의 열기를 느꼈던 것이다. 황학동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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