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축구를 즐긴다는 것

뜩이나 축제다운 축제도 없는 나라아니던가. 월드컵에 별 다른 유감없다. 승부욕을 즐기면 무조건 마초라는 의식도 좀 웃긴다. 과거엔 꽤나 유명했던 자칭 여성 운동가 신 모씨는 광장응원, 그 광란의 틈바구니 속에서 몸뚱이 흔들어대는 여인들은 성폭행당해도 싸다고 했던데, 뭔 그리 과격한 말씀을. 2002년 시뻘건 군중 속 여자마초, 남자마초들 사이에서 나도 울었다. 눈물이 나더라. 난 역시 마초야. 인생사는 동안 몇 번 없는 축제를 즐기는데 있어 애써 엄숙한척 할 필요 없다. 그건 버스 좌석에 있는 힘껏 다리 오므리고 죽상 짓고 있는 소심마초 보는 것과 비슷하게 우습다. “나는 월드컵이 싫어요, 내셔널리즘이에요”라고 그럴싸하게 선언하고 골방에 숨어 들어가 축구 보려는 당신 말이다. 당위성과 취향이 어긋날 때는 차라리 취향을 따라라. 그게 덜 어색할뿐더러, 궁극적으로 세상 밝아지는데 도움될 거다. 그런 거 잘 못하고 자기 정체성 제대로 파악 못한 채 '남들이 옳다고 하는 것‘ 따라가던 사람들이 나이 들어서 변신 386소리 듣고 거저 준 정권도 뺐기고 바보 취급받는 거다. 뭐 그렇다.


그런데. “한국에서 축구를 즐긴다는 것”이라는 문장이 함의하고 있는 정치성에 대해 무감각하자는 건 아니다. 응원을 해도 꼭 빨간 옷을 입어야하고, 무슨 해괴한 춤을 죄다 따라해야 하고, 월드컵에 관심 없으면 매국노 취급받고, 멀쩡한 광장을 대자본에 강탈당해 새까만 어깨들 사이에서 “대한민국~”외쳐야 하는 상황은 확실히 비극이 맞다. "우리는 대한민국입니다"라니. 이런 내가 왜 대한민국이야, 썅. 올해 16강에 들지 못했으면 하는 푸르른 소망이 있다. 아마 1조원 정도의 예산 낭비가 발생할게다. 언론은 “축구광풍이 야기한 거품경제“ 운운하며 정부 비판하고, 시내 곳곳에 뻘건 칠 해놓은 자본가들 속도 좀 타겠지. 명동 한 복판에서 “대한민국” 목 놓아 부르짖는 식의 낯 뜨거운 CF도 하룻밤 새 자취를 감출 것이다. 아싸. 그렇게만 된다면 4년 후 월드컵 때는 훨씬 정제된 감정의 분출과 유희가 가능할 것이라 확신한다. 자본의 행동양식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단순하니까. 한 번 물리면 대단히 조심스러워지는 게 돈이고 자본가다. 그때가 되면 하루 종일 국가와 나를 동일시해야 하는 넌센스에 동참하지 않아도 축구와 축제를 충분히 즐길 수 있다니깐. 믿어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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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드컵 열풍과 블로고스피어 2006/06/12 14:58 #

    온 나라가 월드컵에 열광하는것과달리 블로고스피어는 유난히 월드컵에 대해 비판적이다. 이성적인듯하지만 다분히 감정적인, 비판에 동조하는 군중심리가 주를 이뤄 안타까움이 더한다. 물론 그 중에는 ozzyz님의 글처럼 인상적인 글도 있지만. 비판적인 의견이 나쁘다는것은 아니다. 건전한 비판은 사회를 발전시키는 밑거름이 된다. 하지만 무조건적인 비판, 대안없는 비판, 군중심리, 부정적인 사고방식은 좋지않다. 디지탈 히키코모리의 대표적인 나쁜 습관이 이런 비판적인 사고방식 아니던가. 무턱대고 비판부터 하기전에 축제의 흐름을 몸소 느껴...... more

  • 드뎌 오늘 시작이다 2006/06/13 11:00 #

    ozzyz review 『한국에서 축구를 즐긴다는 것』으로 트랙백 평소 '버스 좌석에 있는 힘껏 다리 오므리고 죽상 짓고 있는 소심마초'인 내가 좀 우스워보일 수도 있겠으나, 다행히 나란 인간은 축구에 대해서 당위성과 취향이 어긋나지는 않기에 안심이다. 그저 “나는 월드컵이 싫어요, 내셔널리즘이에요”라고 그럴싸하게 선언하고 골방에 숨어 들어가면 조용히 기타 연습이나 하고 어제 도착한 지미헨드릭스 클래식 퍼즈나 시험해보고, 온동네 시끄러운 소음에 대비, ..... more

덧글

  • erasehead 2006/06/10 13:33 # 답글

    한국에서 어머님왈 " 빨간티(붉은 악마 티셔츠) 몇개 사서 좀 부쳐주랴?" 에이, 여기는 그런거 필요 없어요. 오늘 개막전. 주인님과 파자마차림으로 콜라마시면서 재미있게 보면서, 왜 월드컵은 4년에 한번 밖에 안 하지? 2년에 한번씩 하면 참 좋을텐데... 했습니다. 저는 이런 단순한 월드컵이 좋아요.^^
  • 월덴지기 2006/06/10 13:44 # 삭제 답글

    믿쑵니다~
  • FeeL 2006/06/10 18:43 # 답글

    기업들은 16강 탈락시의 광고도 이미 준비하고 있다죠. 모로가도 돈 벌리는 이벤트 같습니다. 유독 상업적으로 변한 응원문화에도 묘한 반감이 생기게 됐어요.
  • 91 2006/06/10 21:41 # 삭제 답글

    K리그는 깡통을 차도, 국가대표 축구만 축구로서 환영받는 현실이 참 답답했었는데, 참 동감가는 글입니다.
    이번에 16강을 탈락한다면, 아마도 냉철하게 현실을 진단하고 되돌아 보게 되겠지요.
    16강을 탈락하게 된다면 약이될수도 있으니, 그리 나쁜일만은 아니죠. ^^
  • 행인1 2006/06/11 00:27 # 삭제 답글

    정말이지, 월드컵의 폭력성에 대해 다시금 되돌아보게 됩니다.
  • ◆박군 2006/06/11 20:58 # 답글

    결국 놀아나는 건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들 뿐입니다. 최근 테레비에 넘쳐나는 축구 관련 프로의 99%는 '쇼'이고, 제가 본 가장 제대로 된 "프리뷰"는 오늘 MBC에서 본 "이경규가 간다"였습니다. 뭔가 의미심장하지요.
    요즘은 정말 2002년 잉글랜드 평가전 당시의 동화면세점 앞마당이 그립습니다. 우리는 시청에서 모이자고 한 기억은 없었는데(웃음)

    하지만 16강 탈락하라는 충격요법 얘기는 이해는 가는데, 팬 입장에서는 이것도 좀 까칠합니다. (대한민국이 민주화 제대로 완성하려면 전두환을 다시 대통령으로 앉혀야 한다- 하고 비슷하게 들리니...)
    그리고 이 충격요법의 부작용이 우려되는 게, 98년 프랑스 월드컵 예선탈락하고 나서 1999년 킹스컵.. 대한민국 국대는 정말 선전을 거듭한 끝에 우승컵을 먹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언론에서는 경기중계는커녕 뉴스시간에 골장면 하나도 없이 자료화면으로 때웠지요. 상상하시는 것보다 훨씬 더 어이없는 결과가 나올 가능성이 있습니다...
  • 戮屍 2006/06/12 00:09 # 답글

    월드컵 자체를 마초이즘,파시즘,나치전당대회로 보는 것도 상당한 오바지만, 지금 우리가 하는 것은 이미 축구응원이 아닌 것 같습니다. 저도 차라리 16강 진출 실패했으면 좋겠네요.
  • 킬미 2006/06/12 01:44 # 삭제 답글

    월드컵 자체를 마초이즘,파시즘,나치전당대회로 보는 것도 먼저 전국민이 월드컵에 오버하니까 단순히 발런스를 맞추기위한 역작용일 뿐이니 민감할 필요는 없다. 그만큼 축구가 진정한 스포츠 오락에서 많이 벗어났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그 틈새를 타서 역으로 언론플레이를 조성해서 인기 유지하려는 좌파 위선주의자들이 등장하는 것 뿐이다.
    그나저나 축구라면 군대 때문에 이가 갈린다. 요즘은 더욱 TV가 싫다.
    월드컵 16강 진출에 실패하면 황종교처럼 음모론 나올까 봐 우습다. ㅋ ㅋ
  • 20세기 소년 2006/06/13 01:39 # 삭제 답글

    내년의 정제된 감정 분출과 유희를 기대하며... 올해는... 씨익 ^_______^
  • 냉이 2006/06/13 17:29 # 답글

    상당히 공감가는 글, 잘 읽고 갑니다.
  • hachi 2006/06/14 12:22 # 삭제 답글

    언론만 이런식으로 안 해 준다면 월드컵이 훨씬 즐거울텐데요. 정작 널리 알리고 고민해야 할 문제(FTP같은)는 뒷전이고 오만가지 잡다한 국대 이야기들로 도배를 하고 있는건, 확실히 요지경입니다.축제는 좋지만 씁쓸하네요.
  • 소년 2006/07/07 12:48 # 답글

    김동렬씨 홈피의 월드컵 관련글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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