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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조리에 대한 암묵적 동의의 달콤한 유혹 외국의 문물과 새로운 가치관들이 꿈틀대던 19세기의 조선후기, '동화도'는 제지를 생산하여 중앙정부에 공물로 바치는 외딴 섬마을이다. 어느 날 제지를 싣고 정박해 있던 수송선에 방화가 일어나고, 마을에는 혈우가 내렸다는 흉흉한 소문이 무성하다. 방화사건을 조사하러 온 원규(차승원)와 최차사(최종원)일행은 방화가 있었던 날 밤에 발생한 살인사건을 명쾌하게 해결하는 듯 싶었으나, 그 모든 것들이 단지 시작에 불과했음을 곧 깨닫게 된다. ![]() <번지점프를 하다> 이후 5년 만에 돌아온 김대승 감독의 <혈의 누>는 매우 익숙한 방법으로, 그러나 엉뚱한 공간에서, 의외의 성과를 건져내는 독특한 작품이다. 얼핏 <혈의 누>의 겉모습은 근래 주목받은 한국의 여타 장르물들과 그들이 이룩한 유행 일변도에 있어 크게 벗어나 보이지 않는다. <혈의 누>의 장르문법은 매우 세련되고 유려할 뿐더러, 그 표현양식에 있어서도 상당한 수위를 점령하고 있다. 주목할 만 한 점은 이 영화의 미스터리 문법이 플롯에서 오는 충격적 결말 따위의 자장 안에 갇히기를 거부하고, 무척 낯선 지점의 통찰을 위한 도구로 소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혈의 누>가 보여주는 모든 갈등의 구심에는 중세적 질서에 살해당한 근대성의 비극이 자리 잡고 있다. 주인공 원규가 기존 장르영화 속의 해결사마냥 극의 중심에서 모든 것을 관조할 만큼 출중하거나 객관적이지 못한 이유는, 그 스스로의 정체성이 '양반 가문의 고위 관직자'라는, 이미 과거의 질서로부터 기인하는 부조리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결국 원규가 느끼는 자아의 한계는 아버지를 부정하지 못한 조선의 한계인 동시에, 중세성을 극복하지 못한 근대화의 실패이기도 하다. <혈의 누>가 진지한 고발자의 역할로 거듭나는 부분은, 바로 그러한 역사적 비극을 가능케 한 원동력에 대중들의 암묵적 동의가 기능하고 있었음을 논증하면서부터이다. <혈의 누>의 모든 것을 집약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집단살해 시퀀스는 원규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맞물리면서, 자유와 평등이 간과된 물질적 근대화가 결국 사상누각에 불과하다는 거대한 통찰로 힘차게 나아간다. ![]() 좀 더 정확하게 말해서, <혈의 누>의 동화도는 군사독재 시절의 대한민국과 기묘하게 닮아있다. 감독은 물질적 쾌락을 위해 폭력을 묵인하고 나아가 그것을 숭배했던 근현대사의 원죄의식을 정면으로 비판하며, 그들의, 우리들의 아버지를 부정하고 나선다. 강우석의 사회고발이 교과서 마냥 편리한 도덕적 판단에서 출발한다면, 김대승의 그것은 아직 봉합되지 못한 근현대사의 생채기들에 대해 논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도발적이다. '공공의 적' 으로 분류될 만큼 간편한 현실비판이 <혈의 누>에는 없기 때문이다. 따져보면 <혈의 누>는 <그때 그 사람들>들보다 오히려 훨씬 더 노골적으로 근현대사에 대해 발언하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그때 그 사람들>이 누군가를 조롱, 혹은 옹호했느냐에 관계없이, '그때 그 사람들' 과 '그때 우리들' 을 구별 짓는 수사법에서 이미 그 한계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면, <혈의 누>는 집권층의 부조리를 가능케 하는 원동력이 결국 대다수 민중들의 자발적 동의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매우 위험하고도 논쟁적인 화두를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혈의 누>는 탁월한 도발성에도 불구하고, 몇가지 지점에서 심각한 문제점을 드러낸다. 차승원과 지성의 캐스팅은 영화에 별 도움을 주지 못했으며, <번지점프를 하다>처럼 지속해서 이어지는 플래쉬백은 급기야 극의 개연성을 저해할 정도로 불편하게 남발되고 있다. 또한 매우 노골적으로 그려진 신체절단 장면들은 그 자체로는 탁월하나, 이를 둘러싼 마을사람들과 원규의 죄의식이 구체화되는데 실패하면서, 감독이 의도한 만큼의 정당성을 부여받고 있지 못하다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 장르적 쾌감이 대중독재에 대한 작가의 메세지에 단 한 번도 우선하지 않는 <혈의 누>는, 결말에 이르러 현실에 대한 순응으로 고개를 튼다. 원규의 선택은 모호하거나 혹은 무책임한 결말이라는 이유로 공격받을 만도 하지만, 사실 간단한 역사인식을 동반한다면 꼭 그렇게 비관적이라고 단정 지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그래서) 조선은 망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극 중, 원규의 입을 빌어 감독은 말한다. "놈이 이런 미친짓을 벌이는 것은, 분명 그만한 과거가 아직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과거를 청산하고자 하는 당위성은 그러한 과거가 계속해서 끊임없는 부조리와 피해자를 낳기 때문에 발생한다. 과거에 대한 공정한 평가와 자성없이, 조선의 과오가 한국의 미래와 무관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혈우보다 더 섬뜩한 것은 바로 지금,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개봉일 2005.05.04 [ozzyz] 허지웅 오마이뉴스와 대자보, NGOTIMES에 함께 송고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