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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시니스트] 죄의식은 영혼을 잠식한다. 공장에서 기계를 다루는 트레버 레즈닉(크리스찬 베일)은 벌써 1년 동안 수면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잠을 '안' 자는 것이 아니라, 무슨 이유에서인지 잠을 이룰 수가 없기 때문이다. 뼈만 남은 채 앙상하게 말라버린 레즈닉은 주위 사람들의 걱정에도 별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그는 매일 밤 공항 커피숍을 찾아가 웨이트리스 마리아를 만나고 새벽 1시 30분이 되면 그곳을 나서 창녀 스티비와 사랑을 나누는 식으로 길고 긴 불면의 시간들을 채워나간다. 그러던 어느 날, 새로운 용접공 아이반이 공장을 찾아오면서 모든 것이 뒤틀리기 시작한다. 문제는 레즈닉 이외에는 그 누구도 아이반의 존재를 알지도, 보지도 못한다는 것. 은밀하게 다가오는 아이반의 음모, 그리고 현실과 환상을 구별할 수 없는 무질서의 틈새에서 레즈닉과 그의 일상은 산산조각 나버린다. 그리고 이제 레즈닉은, 영화는 우리에게 굵게 눌러쓴 질문을 던지려한다. '누구냐, 넌?' ![]() 또랑또랑한 눈망울을 이리저리 굴리며 잔디밭을 뛰어놀던 아이가 까르르 웃으며 말했다. "전 무신론자가 되기로 했어요." 우리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태양의 제국>에서 천사의 얼굴을 가진, 그러나 감출 수 없는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던 한 아이를 만난 적이 있다. <벨벳골드마인>과 <아메리칸 사이코>를 통해서, 우리는 하룻밤 새 다 자라버린 그의 아름다운 육체와 변하지 않은 눈 밑의 근심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크리스찬 베일은 그렇게 우리들의 기억을 소생시켰다. <세션나인>으로 이름을 알렸던 브래드 앤더슨의 신작 <머시니스트>는 그 때깔에서 데이빗 핀쳐의 영화들을 연상시키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사실상 데이빗 크로넨버그에 훨씬 근접해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존재에 대한 질문들을 잊혀진 기억을 통해 재구성하는 자세와 놀랍도록 정밀하게 직조된 맥락들은 크로넨버그의 근작 <스파이더>와 교묘히 겹쳐지면서 색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머시니스트>는 우리가 알고 있는 배우에 대한 기억이 온전히 투영될 때, 비로소 방점이 찍혀지는 영화이다. 크리스찬 베일의 아름다운 외모에 대한 상념들은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완벽하게 배신당하고, 망가졌다기보다는 파괴당했다는 표현이 적절한 그의 모습은 그 자체로 영화의 주제를 충분히 감당해낸다. 자, 이것은 존재에 대한 이야기이다. 존재를 형편없이 일그러뜨리고 변형시킨 과거와 그에 대한 또 다른 기억들이다. 영화는 관객들을 그 혼돈의 지옥 속으로 힘껏 몰고 들어간다. ![]() 주인공의 사소한 행동양식이나 대사들을 토대로 우리는 그의 내밀한 정신세계를 들여다 볼 기회를, 그리고 레즈닉의 질문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얻는다. 레즈닉이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 를 읽거나, 늘 표백제로 손을 씻는 행위들은 단순히 비정상에 대한 은유가 아닌, 죄의식을 감추고 나아가 이를 치유 받고자 하는 무의식의 욕망들을 대변하는 것이다. 그가 깨끗해지기를 갈망하며 행하는 일련의 의식들은, 마치 도스토예프스키의 캐릭터들이 그러하듯이 결국 극명한 선과 악으로 분열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어쨌든 자아가 분열된 상황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머시니스트>의 반전이자 극 전반에 산재되어 있던 단서들이 하나로 모아지는 지점은 레즈닉의 죄의식과 분열에 대한 욕구를 발생시킨 원인, 그 '잊혀진' 기억들이다. 갈갈히 찢겨져나간 그림의 잃어버렸던 한 조각처럼, 이 기억은 레즈닉의 고민과 갈등들을 친절하게 설명해주며 이야기 전체를 하나의 연대기적 구성으로 완결짓는다. 아귀가 들어맞아가는 순간의 쾌감은, 그러나 생각만큼 강렬하지는 못하다. 하지만 레즈닉의 비극은 단순히 종극에 밝혀지는 '반전'으로 온전히 읽혀질 만큼 가볍지 않다. 그의 육체와 정신에 균열을 발생시킨 죄의식이 어떤 종류임에 관계없이, 그것은 모든 이들에게 이미 전제되어 있거나 혹은 언제라도 발생할 수 있는 일상의 연장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반전이 다소 밋밋하다거나 혹은 애초부터 설명이 끝난 결과라는 관객들의 '이해할만한' 반응은 상황의 일상성을 강조하려는 작가의 의도와도 정확히 맞아 떨어진다. ![]() 그러니까, 존재를 통째로 뒤흔들만한 사건이 늘상 유령이나 근친상간 같은 충격적 트라우마에서 기인한다는 생각은 영화들이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하다. 범인들의 일생에 드라마틱한 반전 따위는 없다. 결국 우리는 언제라도 레즈닉만큼 파괴될 수 있는 가능성 위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부디 당신이 거울 앞에서 당신이 누구인지를 질문하는 상황에 이르지 않기를. 살아남기를. 그것이 <머시니스트>가 던지는 가장 큰 공포이자 깨달음, 그리고 간곡한 부탁이다. 개봉일: 2005.04.09 KBS 프리미어/ 단성사 일주일간 동시개봉 [ozzyz] 허지웅 오마이뉴스와 대자보에 송고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