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의 실패로 거리까지 내몰린 전 아시안 게임 은메달리스트 강태식은 사람들에게 매를 맞아주고 돈을 받는 일을 시작한다. 뒷골목에서 삥을 뜯거나 패싸움을 일삼고 살아가던 유상환은 소년원에 수감된 이후 나름의 목적의식으로 권투부에 들어가 운동을 시작한다. 가족사에 관련된 한과 분노로 두 남자의 주먹이 파르르 우는 그 순간 신인왕전이라는 링의 무대가 그들을 유혹하고, 마침내 두 사람은 결승전에서 만나게 된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로 화려하게 데뷔했던 류승완 감독이 어느덧 4번째 장편을 선보였다. <주먹이 운다>는 그의 전작들처럼 인물간의 대결을 통해 삶의 치열한 양상을 관조하고 있지만, 인생의 가치와 의미를 '기쁘게' 토로하는 여유로움과 한층 넓고 깊어진 시야의 측면에서 볼 때 분명 몇 발자국 더 나아간 지점의 작품임을 확인할 수 있다.

사실 류승완 감독은 지리멸렬한 삶에 대해 어떠한 해답이나 대안을 늘어놓을 만큼 사려깊지 못하다. 어떠한 치유의 여지를 남길 만큼 너그럽지도 못하다. 대신에 그는 황폐해진 인생들이 충돌하는 지점을 최대한 생동감 있게 포착하며 주먹과 주먹이 빚어내는 갈등의 순간을, 개인의 삶을 규정짓는 무척 사사로운 신념의 차원으로 승화시켜왔다. 거기에 논리적인 정답 따위는 없다. 스스로 자신이 옳았다고 믿으며 몸부림치는 인간 군상들이 저마다 요란한 소리로 대립각을 세우고 있을 뿐이다.
<주먹이 운다> 에서 류승완 감독은 여전히 갈등을 봉합하거나 무마시키려 애쓰지 않는다. 마지막 라운드가 끝난 이후에도 태식은 여전히 버림받은 남편이자 무력한 아버지이며, 상환의 승패가 아버지를 살리거나 할머니를 건강하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링 위에서의 판타지는 승자의 몫으로 남는 것이 장르적 수순이건만, 이 경우 어느 쪽도 온전한 승자가 되기에는 부족해 보인다. 여기,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명백한 두 명의 패배자가 동시에 승리하는 방법이야 말로 <주먹이 운다>가 전해주는 페이소스의 전말이다.
길거리 복서 태식이 신인왕전을 결심하게 되는 계기는 승리 이후에 얻게 될 명예나 재물의 차원이 아닌, 스스로에 대한 믿음의 문제이다. 삶의 마지노선까지 밀려난 이후 자신이 살아온 인생과 그 안에서 터득해온 가치들이 통째로 흔들리는 상황에서, "내가 맞게 살아온 것 맞니?" 라며 링이라는 이름의 거울에 대고 자문하는 식이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의 상환을 연상시키는 소년원 복서 상환 역시 마찬가지이다. 상환에게 신인왕전이 로또복권은 될 수 없지만 핏물로 한자 한자 적어 내려간 반성문으로는 합당하다. 물론 수취인은 공사현장에서 죽은 아버지도, 병석에 누워있는 할머니도 아닌 상환 그 자신이다. 결국 이들이 인생을 내걸면서 갈구한 것은 대결에서 얻어지는 승리가 아닌, '네가 옳았어.' 혹은 '여기 있어도 돼' 같은 자기존재에 대한 당위성의 긍정인 것이다.
두 남자는 그렇게 스스로에게 확인시키듯이 상대의 얼굴에, 복부에 주먹을 날린다. 그 몸사위 하나 하나에 개인의 삶을 통째로 꿰뚫고 성찰해나가는 온갖 종류의 변명과 눈물, 후회같은 복잡한 감정들이 실려져 허공에 뿌려진다. 최민식이 류승범과 같은 체급인 63킬로그램이라는 비현실적 상황과, 마지막 시합에 주인공들의 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는 구태의연한 장치들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이들의 몸뚱아리가 부딪히며 자아낸 섬광은 보는 이의 마음을 놀랍도록 눈부시게 공명시킨다.
주인공들을 둘러싸고 각기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이 두 인생의 마지막 라운드를 숨 죽인채 지켜보는 광경, 특히 우동집 사장이 흘리는 입가의 짧은 웃음은 이 작품을 총체적으로 역설하는 대목이라고 할만하다. 이 다양한 인물군상들이 누군가를 응원하는 행위는 자신의 삶이 용서받기를, 혹은 누군가에게 받아들여질만큼 합당해지기를 고대하는 욕망과도 같다. 이는 자칫 고루해보일 수 있는 육체의 향연을 단지 '수컷들의 자기연민' 이 아닌, 스스로에게 인정받고 싶은 인간의 보편타당한 욕구로 확장시킨다.

<주먹이 운다> 는 삶을 마주한 한없는 긍정과 확신으로 가득찬 영화이다. 비록 그 과정이 험난하고 고단했지만, 경기가 끝난 이후 주인공들이 흘리는 눈물은 그만큼 고귀하고 가치 있어 보인다. 이러한 맥락에서 승패 따위는 애초부터 그다지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없으며, 상대적으로 더 불안해진 패자의 미래 역시 영화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것은 인생의 불확실성에 대한 예찬의 몫으로 남겨놓자.
애드리안을 외치는 록키가 있으면 어깨를 늘어뜨린 아폴로가 있어야만 했던 링 위에서, 류승완 감독은 동시에 승리한 두 명의 인간을, 자기 존재의 가치를 증명한 두 개의 삶을 보여준다. 이 광경은 그 희소한 가능성만큼이나 소중하고 진귀한 깨달음이다. 울거나 혹은 기쁘거나. 자, 이것이 인생이다.




덧글
샤오군 2005/04/02 16:56 # 답글
보고 싶은 영화입니다. 잘 읽었습니다.lunamoth 2005/04/02 17:02 # 삭제 답글
별 기대없이 선택했던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그 속에서 처연한 눈빛들과 불가항력이란것에 매료됐었죠. 다시 예전의 감정선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삶을 보듬어 내는 이 영화를 보고 꽤 마음이 동했습니다. 다소간의 흠결은 뭐라하든 간에 그속엔 말씀처럼 인생이 오롯이 담겨져 있어서 였겠지요. ozzyz님의 감상에 제청합니다 ;)namupiri 2005/04/02 17:22 # 답글
저도 이 영화 너무너무 보고 싶어요..^^ 감상글을 읽으니 더 보고 싶어지네요.... 사람이 많지 않은 영화관에서, 핸폰소리안나고, 번쩍거리지 않는 그런 극장이 있다면... 가서 보고 싶어요....최민식아저씨와, 멋진 승범군이 나오는 것만으로도 저는 마음이 설ㅤㄹㅔㅆ답니다..
ozzyz 2005/04/02 17:27 # 답글
lunamoth/ 번번히 먼저 트랙백 보낼 기회를 놓치네요. 제청해주셔서 감사 ^^ (부끄)namupiri/ 승범군을 좋아하신다면 이 영화, 꼭 보셔야겠는걸요. 류승범에게 배우로써의 성과를 확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거든요. 꼭 보세요 ^^
Guts 2005/04/02 21:14 # 답글
잘 읽었습니다. ^^)/ 아구, 보고 싶어지네요 orz민식 아찌가 시나리오가 맘에 들어서 했다고 하던데... 올드보이와 같이 강한 카리스마를 내뿜을런지요. ^^;;
seefall 2005/04/02 21:55 # 답글
저는 왜 3.31에 이걸 극장에서 본걸까요;;;류승완 감독의 10년후가 갑자기 기대되는 영화였습니다.
ozzyz 2005/04/02 22:13 # 답글
seefall/ 요즘에는 하루먼저 개봉하는 곳도 꽤 있더라구요, 혹은 전날 심야라도 말이죠. 류승완뿐만 아니라 어떤 누구라도 10년후는 기대해봄직한 시간이 아닐런지요, 제 스스로도 말이죠. 입대전에 몸관리 잘하세요! ^^Guess 2005/04/02 22:39 # 삭제 답글
님 성함이 "허 지웅"님인가요? 엠파스의 "영화마을 이장"님도 아시나요?그 분도 영화 무척 좋아하시는데.ozzyz 2005/04/02 22:44 # 답글
Guess/ 영화 좋아하시는 분이야 많겠지요. ^^;; 엠파스는 잘 안가서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 방명록에 엠파스 관련 글 쓰신 분인지..푸르미 2005/04/02 23:28 # 답글
잘 봤습니다. 꼭 보려고 하는데... 하긴 둘이 체급이 좀 안맞긴 하죠..boogie 2005/04/03 00:26 # 답글
아주 눈물나게 슬플것 같아요..ㅜ.ㅡreme19 2005/04/03 03:26 # 답글
류승범의 연기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습니다만.. 느낌에 이 영화를 보면 생각이 달라질 것같군요.ozzyz 2005/04/03 06:36 # 답글
푸르미/ 체급이 '많이' 안맞죠 ^^;; 그렇지만 영화에 대한 몰입에 별 문제를 끼치지는 못하더라구요.boogie/ 눈물을 흘리게끔 정통으로 가격을 날리지는 않지만, 그 과정까지의 여정이 충분히 '울리더'군요. ㅡ.ㅜ
ozzyz 2005/04/03 06:38 # 답글
reme19/ 류승범은 최초로 '인정안 할수 없는' 연기를 합니다. 그게 과잉이든, 혹은 지나치게 힘이 들어간 연기이건 간에, 확실한 것은 <죽거나 혹은..>의 그 상환이 물리적으로, 내면적으로 확 성장했다는 느낌을 전해준다는 거에요. ^^ 꼭 보세요.mavis 2005/04/03 10:38 # 답글
전 아라한 보고 참 별로였기에 그닥 기대가 가지 않는 감독입니다. 그래도 이번엔 얘기가 많이 들려서 보고 싶긴 하더라구요.ozzyz 2005/04/03 13:50 # 답글
mavis/ <죽거나..> 에서 한번에 건너뛰어온 느낌이려나요. 지금까지의 탐구의 영역에서 성찰의 단계로 접어든 것 같습니다. 한마디로, 부럽습니다.return 2005/04/03 15:27 # 답글
: 저는 류승완 감독의 전작인 '아라한-장풍대작전'을 굉장히 재밌게 봤기에 '주먹이 운다'도 많이 기대했던 작품이었습니다.저도 seefall님처럼 3월 31일에 봐서 그날이 개봉일인 줄 알았...(;)
'달콤한 인생'과 같은 날 봤는데, (물론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달콤한 인생'에 한 표를.
참, 링크 신고합니다.^_^
ozzyz 2005/04/03 23:04 # 답글
return/ 들러주셔서 감사해요. 저도 링크했어요 *^^*갈림 2005/04/04 13:47 # 답글
괜찮게 봤는데, 가족 휴머니즘을 강조한 건 좀 진부하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특히 강태식의 마지막 장면은 그 옛날 헐리웃 가족 영화 "챔프"를 연상시키더군요.ozzyz 2005/04/04 17:54 # 답글
갈림/ 혹시라도 태식을 죽여버리는 센티멘탈을 노렸다면 용서받지 못할 영화가 되었겠지요 ^^; 개인적으로 영리한 영화라고 생각해요. 갈림님 반가워요 ㅡ.ㅜmavis 2005/04/04 19:16 # 답글
저는 사실, 외모가 부럽습니다. --;;ozzyz 2005/04/05 19:16 # 답글
mavis/ ㅜ.ㅜ 그런거였군요.푸르미 2005/04/13 21:02 # 답글
영화를 보고 다시 보니 또 다르네여~ 잘봤습니다ozzyz 2005/04/14 07:52 # 답글
푸르미/ 저도 푸르미님 글 잘 읽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