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원주의 나부랭이에 기계적으로 근거하지 않아도 서로 다르다는 것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세상. 나의 다름과 너의 다름이 어떤 위계도 없이 어울리되 나도 옳고 너도 옳다는 헛소리는 폭력이라 말할 수 있는 세상. 차라리 모두가 이방인인 세상. 진영이라는 환상 안에서 질투와 자기연민에 사로잡혀 서로 잘났고 자신만이 유일한 진짜라고 우기는 인증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세상. 우리는 무엇무엇 해야 한다, 왜냐하면 무엇무엇 해야만 하니까, 식의 당위가 실제를 위협하지 않더라도 충분한 상식이 통용될 수 있는 세상. 자기 행동에만 특별한 맥락이 있다며 똑같은 행동을 하는 타자에게 쉬운 가치판단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절룩거리는 세상. 조직 안에서의 사람 됨됨이를 따지는 데 유독 천착하지만 정작 진짜 됨됨이에는 예민하지 못한, 인간적일 것을 강요하는 비인간적인 반푼이들이 멸종된 세상. 그런 세상.
우리가 왜 서로 돕고 살아야 하는지에 관한 칼부림 우화. 표현 수위에 관해서는 좀 더 긴 원고에서 이야기하겠지만 한국에서 사는 사람들이 눈 앞에 펼쳐지는 이 정도의 폭력을 불편해하는 위선에 대해 나는 도무지 참을 수가 없다. 아무튼 한국영화 사상 가장 '이해할만 하게' 행동하는 여자 캐릭터의 탄생. 결말은 좀 쳐 내도 괜찮을 듯 싶지만 어떤 방향에서 보든 추천할수밖에 없다. 김기덕이 한국영화에 끼친 가장 큰 순기능은 장훈, 이상우, 장철수 등 그의 제자들로부터 나오고 있다.
이어지는 내용
이송희일의 두 번째 장편 영화 <탈주>는 군대로부터의 탈주를 그리고 있지만 사실 지켜지지 않는 약속과 사회적 규범들로부터의 탈출을 그리는 영화다. 이 영화는 부조리의 체계를 시각화하거나 강조하기보다 세상의 모순을 이미 기정사실화한 상태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내내 달린다. 갈등은 쉽게 촉발되고 감정은 차갑게 묘사되며 여정은 조급하고 신속하다. 그리고 결국, 파국의 절정에서 서둘러 막을 내린다. 다소 헐겁거나 이가 빠진듯한 대목들에도 불구하고 다스려지지 않는 힘이 있는 영화. 결국, 우리는 갈 곳이 없다.
이어지는 내용
오전에 트위터에서 고재열 기자와 잠시 논쟁이 붙었다. '트위터가 세상을 바꿀 수 있느냐'에 관한 문제인데 신기술이 세상을 바꾸고 있다는 구호같은 말들에 대해 나는 불만이 있다. 블로그에 올리지는 않았지만 청소년 인문학지 <자음과 모음R>에 관련된 칼럼을 쓰기도 했고. 그건 그냥 도구일 뿐이고 중요한 건 그걸로 무슨 말을 할 것이냐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얼마 전 트위터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었다.
(ozzyzzz 허지웅) 트위터가 세상을 바꿀것이라며 용비어천가 읇는 아저씨들 보면 좀 안됐다. 자신이 바꾸지 못한 세상을 기술이 바꿔줄것이라 착각하면 마음은 편하겠지만 이건 그냥 도구일뿐이다. 트위터는 블로그는 인터넷은 이래야 저래야 어쩌고저쩌고 너무 피곤한 수사들.
이어지는 내용
폴 쉐어링의 <엑스페리먼트>는 여러모로 실망스럽다. 연출은 헐겁고 캐릭터는 과장되거나 낭비되며 이야기는 허술하기 짝이 없다. 어느 한구석 좋은 평가를 내릴 수 없는 영화를 만나는 일은 곤혹스러운 경험이다. 무엇보다 애드리안 브로디와 포레스트 휘태커가 연기하는 두 주인공이 문제다. 동기도 빈약하고 결론은 축소된다. 이건 통제된 실험 상황에서 억압하는 자와 억압 당하는 자로 역할을 나눈 ‘보통’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보여주는 이야기다. ‘이상한’ 사람들이 어떤 심술을 부리는지 보여주는 이야기가 아니란 말이다.
이어지는 내용
민주당을 보고 있으면 개량한복을 입고 막걸리를 마시며 ‘사노라면’을 부르는 낭만주의자가 떠오른다. 이 술 취한 낭만주의자의 낭만은 비전이 아닌 피해망상으로부터 나온다. 사노라면 언젠가는 밝은 날이 오겠고 흐린 날도 날이 새면 해가 뜨지 않더냐만, 사실 날이 새고 해가 떠도 흐릴 날은 아침부터 흐리다. 정의와 민주 정신을 부르짖는 민주당의 낭만적 사고는 보는 사람을 짜증 나게 만든다. 세 바퀴 째 무인도에 갇혀있는 부루마블 플레이어의 문제는 황금열쇠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판을 읽을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내용
알렉산더 아야의 <피라냐>는 피라냐가 나온다는 것을 제외하면 저 엉성한 원작 시리즈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엉성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피라냐>는 <죠스>보다 <데드 얼라이브>에 가까운 영화다. 가슴 큰 여자들의 알몸과 피라냐와 살과 뼈가 분리되는 농담으로 가득한 이 3D 입체 영화는 영화적 완성도에 관한 모든 종류의 염려와 강박을 별 일 아니라는 듯 초월해버린다. 대신 후반부의 대량 신체훼손 시퀀스만을 향해 별 진지함 없이 돌진해나갈 뿐이다. <데드 얼라이브>의 후반부 살육 시퀀스를 물 속에서 재현해내는 동안 알렉산더 아야는 이 상황을 충분히 즐기고 있고 관객 또한 그렇기를 고대하는 눈치다. 90년대 스플래터 팬덤 관객들을 들썩이게 만들 3D 입체 알몸과 살육의 롤러코스터. 어찌됐든 나쁘지 않은 오락 거리다.
이어지는 내용
김지운은 점점 더 일상적인 풍경으로부터 이탈하고 있다. 자주 함께 거론되는 동 세대 다른 감독들은 일상적인 인물들의 일상적이지 않은 이야기를 선호한다. 그는 대신 일상적이지 않은 인물들이 일상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건을 겪는 쪽을 선택한다. 이런 취향은 <반칙왕> 이후 거의 예외 없이 되풀이됐다. 그래서 우리는 <악마를 보았다>의 전반부에 등장하는 사람의 귀를 보고 <블루벨벳>만큼 전율할 수 없다. 국정원 직원과 그의 임신한 애인과 연쇄 살인범, 그리고 한 차례의 죽음이 지나간 저 세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더 이상 놀라울 게 없는 것이다.
이어지는 내용
이하늘 논란과 관련하여 그나 DOC의 성공이 예능 프로그램의 덕을 보았느냐 보지 않았느냐 여부는 문제가 될 수 없다. 화두는 방송 권력에 대한 문제 제기 자체에서 발견된다. 시스템에 참여한 사람은 시스템의 문제에 대해 발언할 자격이 없다는 말은 모자란 생각이다. 시스템에 참여해 본 일이 없는 사람이 시스템의 문제에 대해 발언하는 건 쉬운 일이다. 시스템에 참여했으며, 심지어 그로 인해 덕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문제에 대해 지적하는 사람을 보고, 상식을 가진 사람들은 위선이 아니라 용기라고 말한다.
이 인터뷰는 2년 전에 진행되었다. 해가 질 즈음 스튜디오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이하늘은 당시에도 DOC 7집을 고민 중이었다. 방송 권력에 대한 평소의 생각도 언급된다. 이하늘의 발언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텍스트라 다시 끌어 올린다.
이어지는 내용
살다 보면 별 일이 다 있게 마련이다. 이를테면 저 촬영장의 공기 마저 돈으로 환산해 세금으로 물리고 싶다는 충동이 일게 만드는 영화를, 살다 보면 만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이어지는 내용
대통령님께 꼭.. 택시기사의 부탁은?
나 앞으로는 진지한 기사만 쓰기로 했어.
이것보다 재미있는 기사를 쓰라는 건 정말 무리야.
어떻게 흉내 정도는 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가도,
흡사 키다리 아저씨를 미소로 매수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대통령 아저씨의 상냥한 대답과
베르사이유의 오스칼이 굳이 총탄에 맞지 않았더라도 훌륭한 엔딩을 치를 수 있었을 것만 같은
아름다운 마지막 결론 앞에
나는 된장찌개를 뜨던 숟갈을 내던지며 팬티 바람으로 상수동 사거리에 곧장 달려가
뉴욕 헤럴드 트리뷴!
을 외치지 않을 수 없을 것만 같은 심정에 휩싸이고 말았어.
이것만큼 재미있는 기사를 써주시오! 라는
원고 청탁 전화가 걸려올까봐 전화기를 꺼놓고 애초 전화기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인셉션을 걸어놓은 가운데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야 무리...
이제 와 주성치와 빌 머레이의 사사를 받아 고추로 철사장을 연마한다하더라도
이것보다 재미있는 기사를 쓸 자신이 없어....
지난 주, 너는 정말 참을 수 없이 고칼로리라는 이유로 햄버거가 고혐모(고칼로리를 혐오하는 고칼로리 패스트푸드의 모임)로부터 제명 당했다. 햄버거의 제명을 선언한 건 다름 아닌 피자였다. 피자에게 고칼로리라 지적 당한 햄버거의 쓸쓸함을 감히 이해한다고 말하지 마라. 그건 그의 햄 패티를 두 번 튀기는 일이다. 세트 메뉴도 아니고 퇴출이라니. 출시된지 얼마되지 않은 초선 버거였단 말이다. 햄버거는 “정치 생명을 걸고 허위 왜곡 보도에 대해 민·형사상 모든 법적조치를 취하겠다"고 밝혔다. 그렇게, 국회의사당 바닥에 흥건한 기름의 향연이 정국을 바삭하게 달구었다.
이어지는 내용
이걸 정말 제정신 가진 여자의 평균적인 상식이라 생각해서 분노하나? 절대 아니다. 이 발언과 관련해 게시판들에서 논의되는 이야기를 들여다보면 가관이다. 여자를 군대에 보내야한다는 말 정도를 제외하면(여성의 군역은 병역을 '국민의 의무'라고 명시하고 있는 헌법이나 징병제를 바꿀 생각이 없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실현되어야 한다. 여성의 군역이 실현됐을 때 더 이상 여성을 차별할 구실이 없을 삼류 마초들과, 차별에 별 영향을 받지 않는 위치에서 레이디 퍼스트 따위 적정한 보상에 만족하며 그것을 충분히 활용하는 삼류 부르주아 마담들만이 침묵하거나 부정한다) 어째 죄다 동료의 무덤 앞에 흐느끼는 람보가 된 것 같다. 그러나 피해의식을 부정하기 위해 군대가 아닌 여성 집단을 욕하는 건 감정의 과잉이고 낭비다. 당신에게 보상심리를 불러 일으킨 가해자는 정부와 지켜지지 않는 헌법과 군대 권력이며, 그것에 동조하는 방식으로 다른 누군가를 욕하는 건 스톡홀름 신드롬에 불과하다. 남자와 여자를 겨우 나쁜 놈 좋은 놈 수준으로 비유하는 모자란 사람의 천박한 유머를 반박하기 위해 군대를 미화할 필요는 없다. 그렇게 되면 그녀의 농담 안에서 소비되는 "남자"가 되기를 부러 자처하는 꼴이다. 군대가 살인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는 말은, 적어도 군필자라면 인간적으로 제발 하지 말자. 문제는 이 발언을 한 주인공의 멘탈이다. 우리가 왜 젠더의 이름을 빌어 모자란 사람에게 대응해야 하는가. 그건 이 더운 날에 사람들을 모아 할 수 있는 가장 미련한 일이다.
이어지는 내용





최근 덧글